1926년 8월 2일

얼마나 미웠으면 폐간에 작두질로 흔적조차 없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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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지령문(指令文), 즉 명령문이 날아들었습니다. 거기엔 ‘발행을 금지함’이라고 쓰여 있었죠. 바로 월간잡지 ‘개벽(開闢)’을 폐간한다는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일방 통보였습니다. 1926년 8월 1일자였죠. 1920년대 전반 우리 지성계를 사로잡았던 개벽은 이 명령으로 사망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최후의 극약조치인 폐간의 이유가 너무나 모호했습니다. ‘안녕 질서를 방해하는 것으로 인정됨’이라는 구절이 전부였으니까요. 지령문을 받아든 개벽의 발행인 이두성은 “갑자기 당한 일이라 아무 생각이 없다. 지령문에 나온 구절 이외에 어떤 말도 듣지 못했다”라고 어찌할 바를 몰라 했죠. 발행기간 내내 ‘조선 유일의 대표적 종합잡지’라고 평가받던 개벽은 사실 창간호부터 혹독한 시련을 겪었습니다.

①1925년 6월 25일 발행된 개벽 창간호 표지 ②총독부가 표지의 호랑이 그림 등을 이유로 창간호를 압수하고 이어 낸 호외판도 압수하자 궁여지책으로 낸 임시호 표지 ③1926년 8월 1일자로 폐간 명령을 받은 1926년 8월호, 통권 제72호 표지. 滌署(척서)는 더위를 씻는다는 뜻으로 여름특집호의 뜻이다. ④개벽 폐간을 통보한 총독부의 지령문
월간잡지 개벽은 1920년 6월 25일에 창간호를 발행했습니다. 3·1운동으로 동아일보 등 신문과 잡지가 태어날 공간이 열린 덕분이었죠. 개벽은 천도교청년회가 개벽사를 만들면서 낸 첫 작품이었습니다. 천도교청년회는 예산의 60%를 개벽사 운영에 쏟아 부을 정도로 헌신적이었죠. 잡지 이름은 1세 교조 최제우가 참형당하기 전 외쳤던 “···천하의 번복운수, 다시 개벽 아니런가!”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제는 창간호라고 봐주지 않았습니다. 몇몇 기사는 물론이고 표지의 호랑이 그림에 ‘불가’ 판정을 내려 압수했죠. 서둘러 다시 편집해 호외판을 냈지만 이마저도 압수였습니다. 결국 5일 뒤 호랑이 그림까지 뺀 임시호를 내야 했죠. 독자들은 매진으로 응답했습니다. 창간 임시호 재판 발행은 국내 잡지역사상 최초였죠.


왼쪽은 개벽사 임직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찍은 기념사진. 배경으로 삼은 '혁명투쟁 개벽' 글귀가 이들이 품은 지향을 알려준다. 오른쪽은 월간잡지 개벽 제호의 변화를 한데 모은 사진이다.
일제강점기 때 잡지는 발행하기 전후로 원고를 ‘이중검열’했습니다. 그런데도 개벽은 모두 72호까지 내는 동안 판매금지 34회, 발행정지 1회, 벌금 1회를 받았죠. 총 발행호수의 절반 정도를 판매 금지했으니 개벽사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렇지만 천도교는 무릎 꿇지 않았습니다. 압수하면 호외를 내고, 호외마저 압수하면 임시호를 내는 식이었죠. 25호 임시호 알림 끝부분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형제여 우리 마음은 아프외다 괴롭소이다. 그렇지 않아도 모든 것이 여의치 않은 우리로···다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비록 활이 꺾이고 화살이 바닥날지라도 나아갈 것뿐이외다. 형제여 우리의 괴로움과 쓰라림을 살펴줄 수가 있겠습니까.’ 이 애달픈 호소로 그때 개벽사의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개벽은 ‘열린 잡지’였습니다. 천도교가 재정 지원을 도맡다시피 했지만 천도교 관련 기사는 전체의 2%에 불과했죠. 대신 독자가 원하는 내용, 민족이 나아갈 방향을 좌우 구분 없이 실었습니다. 이돈화 김기전 박달성 방정환 차상찬 등의 사내 필진은 당시 사회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촉각을 곤두세워 지면에 반영했죠. 1922년에는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을 실어 문명화 근대화의 절박함을 알렸습니다. 물산장려운동 같은 실력양성론에도 앞장섰죠. 1923년에는 ‘민족적 중심세력’ 구성을 주창했습니다. 동아일보 주필 송진우가 1922년부터 제기한 주장과 같은 맥락이었죠. 여기엔 천도교의 전국적 조직을 염두에 둔 자신감이 깔려 있었습니다. 1923년 이후에는 사회주의 관련 글을 크게 늘려 ‘사상 잡지’나 다름없었죠.


왼쪽은 개벽사가 개벽이 폐간당한 뒤 1926년 11월 창간한 별건곤 표지. 乾坤(건곤)은 천지의 뜻이니 별건곤은 '별천지' '별세계'로 이해할 수 있다. 별건곤은 개벽과는 달리 취미와 실묭을 앞세운 대중잡지였다. 오른쪽은 매일신보에 실렸던 별건곤 광고이다.
개벽은 ‘문학잡지’이기도 했습니다. 민족시인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개벽에 발표됐죠. 김소월의 ‘진달래꽃’과 현진건의 ‘빈처’ 등도 지면을 빛냈습니다. 최초의 시 전문지 ‘장미촌’ 동인이었던 박영희가 개벽사의 학예부장으로 활약했죠. 이 때문에 개벽을 ‘문화·민족·계급담론 최고 선전장이자 전장(戰場)’이었다고 말합니다. 당시 청년들은 외출할 때면 습관처럼 옆구리에 개벽을 끼고 다녔답니다. 지성인 대접을 받는 지름길이었기 때문이죠. 사회주의자 박진순이 쓴 ‘모스크바에 새로 열린 국제농촌학원’이 개벽 폐간의 원인이라고 알려졌습니다. 일제는 폐간 조치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72호 전부를 수레로 종로경찰서 뒷마당으로 실어가서 작두로 모두 잘라버렸다고 합니다.

기사입력일 : 2021년 11월 26일
言論界(언론계) 一大(일대) 慘劇(참극)
開闢(개벽)에 發行禁止(발행금지)
한달 걸너 압수당하든 개벽 잡지
이제로부터 영원히 발행을 못해
七年間(7년간) 努力(노력)도 一張(일장) 指令(지령)에


지금으로부터 팔년 젼 만셰운동이 이러나든 긔미년 구월 이일에 리돈화(李敦化)씨 리두셩(李斗星)씨 외 여러 유지가 발긔하야 그 이듬해인 경신(庚申)년 오월 이십일에 발행허가를 어더가자고 동년 륙월 이십오일 창간호(創刊號)를 발행한 월간잡지 개벽(開闢)은 셰상에 낫하난 지 칠년 동안에 가진 고통과 각색 파란 중에서 꾸준히 자라나오든 바 재작 팔월 일일 총독부 경무당국으로부터 안녕질서를 문란케 한다는 리유로 돌연히 그 발행을 금지(禁止)하엿슴으로 동지는 최근에 발행되여 압수를 당한 팔월호(八月號) 뎨칠십이호를 최후로 발행할 자유를 영영 일허버리고 말엇다더라.

指令(지령) 밧든 顚末(전말)
뎐화는 재작일에


잡지 개벽이 돌연히 이와 가치 발행금지를 당한 경로를 드르면 재작 일일은 일요임에도 불구하고 시내 종로경찰서에서 개벽사에 뎐화를 걸고 그 발행인 리두성(李斗星)씨를 호출하엿스나 동씨가 마츰 개벽사에 잇지 아니하야 가지 못하엿든 바 종로서에서는 오후 여섯시 경에 다시 형사를 리두성 씨 자택에 보내여 작일 오전 중으로 동서에 출두하도록 부탁하엿슴으로 리두성 씨는 작 이일 오전 아홉시 경에 동서로 출두하엿든 바 사진과 가튼 개벽 발행금지의 지령을 바다가지고 도라왓다더라.

七十二號(72호) 發行(발행)
卅三號(33호) 押收(압수)
경신년 이래로 지금까지 칠년 동안
발매금지 발행뎡지로 지금은 금지
暴風霜雪(폭풍상설) 七年間(7년간)!


월간잡지 개벽 팔월호가 압수를 당하고 호외를 발행코저 준비 중에 총독부 경무국으로부터 발행금지의 지령을 바다 압흐로는 영영 발행할 자유를 일엇다 함은 별항과 갓거니와 『개벽』은 지난 경신년 륙월 이십오일에 창간호가 발행된 이래 지금까지 해수로 칠년이요 달수로 일흔 다섯달 동안에 발행뎡지를 당한 석달 동안을 제한 외에는 달마다 발행되여 그 호수가 칠십이호에 이르럿는데 그중에서 당국의 긔휘에 뎌촉이 되어 발매금지를 당한 것이 전 발행호수의 거의 반수나 되는 삼십삼호며 이러케 발매금지가 될 때마다 호외로 발행되여 독자에게 배부되엿스며 작년 팔월 일일에는 역시 안녕질서를 문란케 한다는 리유 하에 발행뎡지(發行停止)의 처분을 당히고 삼개월 동안 발행이 못되고 잇다가 그해 십일월에 해뎡(解停)이 되야 다시 발행되기 시작하엿스나 해뎡된 후 지금까지 열달 동안에는 일월호와 오월호의 겨우 두달 동안을 제한 이외에는 오는 대로 발매금지란 혹독한 서리를 마자오면서도 연해 호외가 발행되엿섯는데 끗흐로는 팔월호 중에도 당국의 긔휘에 뎌촉된 것이 다섯 가지나 되나 이번 총독부에서 발행금지란 최후의 저분을 당하게 된 것은 단순히 이 팔월호만이 아닌 듯하다더라.

恒常(항상) 不穩記事(불온기사)
革命思想(혁명사상) 宣傳(선전)
항상 주의와 경고를 하여 왓스나
이번에는 할 수 업시 최후의 처치
◇近藤(근등) 圖書課長(도서과장) 談(담)


이에 대하야 근등(近藤) 도서과댱(圖書課長)은
『현재 조선에는 신문지법에 의지하야 발행권을 어든 언문잡지는 신민(新民) 시사평론(時事評論) 조선지광(朝鮮之光) 개벽(開闢) 등 넷인데 개벽은 대정 구년 오월 이일 부로써 발행권을 여더 가지고 창간호를 발행한 이래 칠십이호가 낫스며 텬도교(天道敎) 긔관잡지로서 처음에는 학술 종교에 관한 긔사를 게재함으로써 목뎍을 삼는다 하야 보증금도 밧치지 아니하엿슴에도 불구하고 창간 당초부터 정치 시사문뎨 등 제한 외에 관한 긔사를 써서 차압이 빈번하엿슴니다. 그 다음에 대정 십일년에 니르러 정치 경제 일반에 대한 긔사 게재를 허락하엿스나 론조는 의연 불온하야 당국으로부터 경고와 설유 바든 일이 일이차가 아니외다. 이리하야 칠십이회 발행 중 삼십이회가 압수를 당하엿고 금 팔월호에는 과격한 혁명사상 선전에 관한 긔사를 만재하엿슴으로 경무국댱 정무총감 총독부과 상의하여 단연한 처치를 한 것이외다』 하더라.

子息(자식)은 죽엇스나
産母(산모)는 如前(여전) 健在(건재)
디방에 간 동지들이 모힌 뒤에 작뎡
엇재든 개벽사는 여전히 활동할 터
發行人(발행인) 李斗星(이두성)氏(씨) 談(담)


놀라운 소식을 둣고 수운이 어리운 경운동(慶雲洞) 개벽사(開闢社)로 차저감애 편즙인(編輯人) 리돈화(李敦化)씨와 편즙주간(編輯主幹) 김긔뎐(金起纏)씨는 마츰 디방에 출장 중이요 그 발행인(發行人) 리두성(李斗星)씨가 긴장된 얼골에 흥분된 어조로
『돌연히 당한 일이 되여 아즉 아모 생각도 업슴니다. 총독부 경무당국자와는 아즉 맛나보지도 못하엿슨즉 지령에 낫타난 소위 안녕질서를 문란케 한다는 리유 이외에는 하등의 말도 듯지 못하엿슴니다』 한다. 다시 압흐로의 취할 대도와 경륜에 대하야 무른즉
『글세요 지금 리돈화 씨 김긔뎐 씨도 출장 중이요 디방에도 동지가 잇스닛가 모다 맛나서 의론을 할 차로 뎐보를 띄우고 긔다림니다마는 개벽사(開闢社)란 원래 『개벽』 한 가지만 발행할 목뎍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사업을 하는 동시에 개벽잡지도 발행하든 것이닛가 우리 동인은 어듸까지든지 『개벽사』를 조직한 정신으로써 목뎍한 사업을 계속할 뿐임니다. 말하자면 아들 하나 일허버린 산모 개벽사는 여전히 건재할 것입니다』 하더라.

언론계일대 참극
개벽에 발행금지
한달 건너 압수당하던 개벽 잡지
이제부터 영원히 발행 못해
7년간 노력도 한 장 명령문에


지금으로부터 8년 전 만세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 9월 2일에 이돈화 씨, 이두성 씨 외 여러 유지가 발기해 그 이듬해인 1920년 5월 20일에 발행허가를 얻어 같은 해 6월 25일 창간호를 발행한 월간잡지 개벽은 세상에 나온 지 7년 동안에 갖은 고통과 갖가지 파란 중에서 꾸준히 성장했다. 8월 1일 총독부 경무당국으로부터 안녕 질서를 문란하게 한다는 이유로 갑자기 발행을 금지하였으므로 개벽은 최근 발행돼 압수를 당한 8월호 제72호를 마지막으로 발행할 자유를 영원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명령 받던 전말
전화는 그저께에


잡기 개벽이 갑자기 이처럼 발행금지를 당한 경로를 들으면 8월 1일은 일요인데도 불구하고 시내 종로경찰서에서 개벽사에 전화를 걸어 발행인 이두성 씨를 호출했으나 이 씨가 마침 개벽사에 있지 않아 가지 못했다. 종로서에서는 오후 6시경에 다시 형사를 이두성 씨 자택에 보내 전날 오전 중으로 경찰서에 출두했더니 사진과 같은 개벽 발행금지의 명령서를 받아가지고 돌아왔다.

72호 발행
33호 압수
1920년 이후 지금까지 7년 동안
발매금지 발행정지로 지금은 금지
폭풍상설 7년 간


월간잡지 개벽 8월호가 압수를 당하고 호외를 발행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총독부 경무국으로부터 발행금지 명령을 받아 앞으로는 영영 발행할 자유를 잃었다는 소식은 별도 기사와 같다. ‘개벽’은 1920년 6월 25일에 창간호가 발행된 이후 지금까지 햇수로 7년이고 달수로 75개월 동안에 발행정지를 당한 3개월 간을 빼고는 매달 발행돼 호수가 72호에 이르렀다. 그중에서 당국의 금지에 위반돼 발매금지를 당한 것이 전체 발행호수의 거의 반수나 되는 33호이며 이렇게 발매금지가 될 때마다 호외로 발행되어 독자에게 배부되었으며 지난해 8월 1일에는 역시 안녕 질서를 문란하게 한다는 이유 아래 발행정지 처분을 당하고 3개월 동안 발행을 못하고 있다가 그해 11월에 정지가 풀려 다시 발행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풀린 뒤 지금까지 10개월 동안에는 1월호와 5월호의 겨우 2개월 동안을 제외한 외에는 나오는 대로 발매금지란 혹독한 서리를 맞아오면서도 연이어 호외가 발행됐다. 끝으로는 8월호 중에도 당국의 금지를 어긴 것이 다섯 가지나 되지만 이번 총독부에서 발행금지란 최후의 처분을 당하게 된 것은 단순히 이 8월호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항상 불온기사
혁명사상 선전
항상 주의와 경고를 해왔으나
이번에는 할 수 없이 최후의 조치
◇곤도 도서과장의 말◇


이에 대해 곤도 도서과장은 “현재 조선에는 신문지법에 의해 발행권을 얻은 한글잡지는 신민 시사평론 조선지광 개벽 등 4개인데 개벽은 1920년 5월 2일부로 발행권을 얻어 창간호를 발행한 이우 72호가 나왔으며 천도교 기관잡지로서 처음에는 학술 종교에 관한 기사를 게재함으로써 목적을 삼는다고 해 보증금도 납부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창간 당초부터 정치 시사문제 등 제한 이외에 관한 기사를 써서 차압이 빈번했습니다. 그 다음에 1922년에 이르러 정치 경제 일반데 대한 기사 게재를 허락했으나 논조는 여전히 불온해 당국으로부터 경고와 권유를 받은 일이 한두 차례가 아니외다. 이리하여 72회 발행 중 32회가 압수를 당했고 이번 8월호에는 과격한 혁명사상 선전에 관한 기사를 가득 실었으므로 경무국장 정무총감 총독부와 상의해 단호한 처치를 한 것이외다”라고 말했다.

자식은 죽었지만
산모는 여전히 건재
지방에 간 동지들이 모인 뒤에 작정
어쨌든 개벽사는 여전히 활동할 터
발행인 이두성 씨 말


놀라운 소식을 듣고 슬픔이 어린 경운동 개벽사로 찾어가자 편집인 이돈화 씨와 편집주간 김기전 씨는 마침 지방에 출장 중이고 발행인 이두성 씨가 긴장된 얼굴에 흥분된 어조로 “갑자기 당한 일이 돼 아직 아무 생각도 없습니다. 총독부 경무당국자와는 아직 만나보지도 못했은즉 명령에 나타난 이른바 안녕 질서를 문란케 한다는 이유 이외에는 아무런 말도 듣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다시 앞으로 취할 태도와 경륜에 대해 묻자 “글쎄요 지금 이돈화 씨, 김기전 씨도 출장 중이고 지방에도 동지가 있으니까 모두 만나서 의논을 하기 위해 전보를 띄우고 기다립니다마는 개벽사란 원래 ‘개벽’ 한 가지만 발행할 목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사업을 하는 동시에 개벽 잡지도 발행하던 것이니까 우리 동인은 어디까지든지 ‘개벽사’를 조직한 정신으로 목적한 사업을 계속할 뿐입니다. 말하자면 아들 하나 잃어버린 산모 개벽사는 여전히 건재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