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선동 줄행랑
正解者(정해자) 익선동 傍觀生(방관생)씨>
◇익선동에는 별로 명물이랄 것이 없습니다. 내외주점이 많고 밀매 음녀가 어지간하니 이것으로나 명물을 삼을런지? 그러나 내외주점으로는 청진동만 못하고 매음녀로는 내놓코라도 병목정 갈보에야 머리도 못들터이니 이것도 저것도 다 명물감이 못됩니다. 그러니 할 수 없이 행랑 많은 루동궁(樓洞宮)이나 들추어 보려합니다.
“익선동 줄행랑”이라하면 그 동리 사람은 어느 집 행랑인줄 다 안다고 합니다. 이 집은 지금부터 7,80년 전에 철종대왕의 백씨되는 곰배대군의 별명을 듣는 영평군(永平君이 홍판서의 집을 사고 든 때부터 루동궁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는데 지금 주인 조선귀족 후작 리해승 각하는 곰배대왕의 오대손이라고 합니다.
곰배대군의 후손으로 리해승 양반도 한때는 세력이 빨래줄 같았겠지요. 그러나 요새는 조선총독이라는 대감에게 세력을 빼앗기고는 영락하기가 가이 없답니다. 닥쳐오는 운명에야 임금의 형님이든 곰배대군의 후손인들 어찌하겠습니까. 남종 여종이 드나들던 행랑방에는 인연도 없는 뭇사람의 차지한 바가 되었고 오직 빗물이 고여 있는 앞마당에 놓인 인력거 한 채가 그래도 후작댁의 체면을 보존하는 듯합니다.
사실(史実)속의 우리동네- 한양도읍(漢陽都邑)이후 살펴본 동명연혁(洞名沿革)]
<30> 익선洞 - 강화도령(江華道令) 철종(哲宗)때의 ‘익랑골’을 개명(改名)
익선동(益善洞)은 현재 행정동인 종로구 권농동(勸農洞)관할에 속해있는 법정동 이름이다. 익선동은 1914년 일제총독부가 이른바 경성부제(京城府制)를 실시할 때 궁동(宮洞) 익동(益洞)돈 녕동(敦寧洞)의 일원과 니동(泥洞) 한동(漢洞)등의 일부를 합하여 만든 새 동네다.
옛적부터 전해 내려오는 동네이름은 대부분 그렇게 이름을 붙였을만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일부 동네이름은 후세에 와서 지나치게 미화(美化)가 된 나머지당초의 동명(洞名)의미를 상실해버린 경우도 있다. 익선洞이 바로 그와 같은 예다.
익선(益善)이란 글자그대로「더욱 착하다」또는「더욱 잘한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또 옛날 중국의「楚」「漢」시대의 명장 韓信은 漢高祖가『그대는 군사를 얼마나 거느리면 잘싸울수 있겠는가』고 물었을때 자신있게「다다익선(多多益善)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즉『군사가 많을수록 좋다』는 뜻으로 한 명언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익선(益善)洞은 그러한 군사를 잘 쓴다든지 또한 모든 일을 더욱 잘하고 더욱 착하게한다는 등의 의미와는 전혀 관계없이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益善」이란 이름은 이 지역에「익랑골」이라는 동네가있었던데서 비롯됐다고한다.「익랑골」의 유래는 바로 이곳에 李씨조선의 제25대 哲宗의 장형(長兄)인 永平君이 거처하던 누동궁(樓洞宮)이란 궁궐이있어 그 궁궐주위에 익랑(翼廊)、즉 대문 좌우쪽으로 줄행랑이 늘어서 있었던 곳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불려왔다 한다.
李씨 조선 제24대 헌종(憲宗)이 승하(昇遐·임금이 세상을 떠남)한 다음 대를 이을 사자(嗣子)가 없어 全溪君(璜)의 제3대인 속칭「江華道令」으로 왕통을 계승케한 것이 철종왕(哲宗王)인데 그는 친아버지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의 묘(廟)도 이「누동궁」안에 모시고 장형인 영평균(永平君)을 살게 해 그후 永平君의 5대손인 이해승(李海昇)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이 궁에 거주하였다고 한다。
哲宗은 즉위와 함께 이곳에「누동궁」을 지었는데 그는「江華道令」으로 통칭될만큼 왕실의 분쟁이 심한중에 서울에도 있지 못하고 멀리 강화島로 들어가 농부생활을 하는등 고생을 했던터라 같이 고생하던 실형(實兄)을 위하고 또 친부모의 신위(神位)를 모셔 제사도 올릴수있게하기위해「누동궁」을 지었던 것으로 전해온다。
哲宗은 그건문양식도 특별히 공을들여 궁궐대문앞에 동서로 익랑(翼廊)을 광대하게 짓게하고 시종들이 살도록 했는데 그후부터 이지역은「익랑골」이라는 동네이름을 얻게 됐다。
그런데 이러한 연유에서 생긴「익랑골」이라는 동네이름은 어느사이엔가 익랑동(翼廊洞)에서 익동(益洞)으로까지 변천을 했으며 또 부근의 일부 지역은 역시「누동궁」이 있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궁동(宮洞)으로 불려졌다。
그후 일제 총독부가 동네를 폐합、새로운 행정구역을 정할 때 예전보다 더 좋은 이름을 붙인다는 뜻에서 익동(益洞)에 선(善)자 하나를 더 추가해 익선동(益善洞)이라는 새 동명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렇듯 역사적 배경을 지닌 동네이름이 후에 와서 전혀 의미가 다른 이름으로 바뀜에 따라 본래의 역사적 사실은 아득히 망각돼가고 있다는 것이 서운한 점이다。
누구나 스마트폰 카메라로 가족과 풍경을 멋지게 찍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사진이 흔해진 시대에, 우리 사진의 원형을 찾아가 봅니다. 사진기자가 100년 전 신문에 실렸던 흑백사진을 매주 한 장씩 골라 소개하는데 여기에 독자 여러분의 상상력이 더해지면 사진의 맥락이 더 분명해질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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