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 년 만에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을 다시 읽었다. 처음 읽었을 때 주요 인물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은 돈만 밝히는 나쁜 사람으로 다가왔다. 샤일록은 안토니오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기일 내 돈을 갚지 않으면 살 1파운드(약 453g)를 받기로 했다. 안토니오는 약속한 시간 안에 돈을 갚지 못했고, 살 1파운드를 떼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샤일록은 돈을 갚지 않는다고 사람을 죽이려 한 나쁜 인물이었다.
샤일록은 돈이 최고였을까
다시 읽어보니 상황이 간단하지가 않다. 셰익스피어 작품들이 명작으로 인정받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등장인물들이 단순히 선과 악으로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장점이 단점이 되고, 단점이 장점이 된다. 햄릿은 착한 성격 때문에 아버지의 원수를 갚지 못한 채 고민만 하다가 죽음에 이른다. 리어왕은 딸을 사랑하는 마음이 독이 돼 자신의 인생을 망친다. 베니스의 상인도 마찬가지다. 샤일록은 나쁜 사람이고, 그에게 돈을 빌린 안토니오와 안토니오에게 돈을 빌린 바사니오는 좋은 사람일까. 최소한 돈의 시각에서 봤을 때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첫째, 샤일록은 돈이 최고였을까. 샤일록은 3000두카트의 돈을 안토니오에게 빌려줬다. 1두카트는 금 3.5g의 가치였으니, 지금으로 치면 12억 원가량 된다. 안토니오는 변제일을 지키지 못했고, 그 대신 살 1파운드를 떼어줘야 했다. 안토니오의 친구 바사니오는 이 소식을 듣고 자기가 대신 갚아주겠다고 한다. 안토니오가 빌린 돈의 몇 배를 줄 테니 안토니오의 살을 떼지 말라고 부탁한 것이다. 법정 판사는 샤일록에게 9000두카트(약 36억 원)를 받고 안토니오와의 계약을 파기하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샤일록이 정말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 제안을 받아들였어야 한다. 12억 원을 36억 원으로 갚겠다고 하니 돈이 목적이었다면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샤일록은 거절했다. 샤일록이 원한 건 안토니오의 목숨이었다. 샤일록은 그동안 계속해서 자기를 욕하고 비난해온 안토니오에게 원수를 갚기를 원했을 뿐, 돈을 벌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샤일록이 돈만 추구하는 사람이었다면 당장 36억 원을 받고 안토니오와의 계약을 없었던 것으로 해야 했다. 샤일록은 돈보다 개인의 원한이 훨씬 중요하다는 점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돈밖에 모른다고 비난받는 샤일록은 오히려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인물인 셈이다.
둘째, 내 개인적 시각에서 보면 베니스의 상인에서 가장 문제적 인물은 안토니오의 친구 바사니오다. 안토니오는 샤일록으로부터 3000두카트를 빌려 그 돈을 바사니오에게 다시 빌려준다. 안토니오는 바사니오를 위해 돈을 빌렸던 것이다. 바사니오가 돈이 필요했던 이유는 포셔라는 여자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였다. 포셔는 돈 많은 상속녀였다. 바사니오는 포셔와 결혼하기를 원했는데, 선물을 주는 등 그 작업을 할 자금이 필요해 3000두카트, 즉 12억 원을 빌린 것이다.
바사니오는 그동안 돈을 낭비하며 살았고, 안토니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었다. 그런데 돈 많은 상속녀 포셔와 결혼하면 지금까지 안토니오에게 진 빚은 물론, 새로 받은 빚도 갚을 수 있다. 바사니오는 안토니오에게 이를 이야기하며 돈을 빌려달라 했고, 사정을 알게 된 안토니오는 바사니오가 사랑의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샤일록으로부터 돈을 빌렸다. 물론 바사니오와 포셔는 젊은 남녀로 서로에게 호감이 있었다. 하지만 바사니오가 포셔에게 적극적이었던 데는 거액의 상속녀라는 배경이 크게 작용했다. 이런 점에서 샤일록보다 바사니오가 더 문제아로 보인다. 무엇보다 빚을 갚기 위해 한탕을 노리고 더 큰 빚을 지는 행태가 그렇다. 베니스의 상인에서 포셔의 신랑이 되겠다는 바사니오의 도박은 성공했지만, 포셔와 결혼하지 못했다면 바사니오는 완전히 파산했을 것이다.
조선과 대비되는 베니스
셋째, 베니스의 상인을 다시 읽으면서 가장 놀라고 감탄했던 부분은 당시 베니스의 사회제도, 계약법 시스템이었다. 셰익스피어 작품들은 16~17세기 영국에서 씌었으니 당시 영국 및 서구 제국의 시스템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베니스 귀족층인 안토니오는 천민층인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으로부터 돈을 빌렸다. 안토니오가 돈을 갚지 못하자 샤일록은 계약서대로 살 1파운드를 받기를 원했다. 베니스 통치자인 공작이 샤일록에게 “그러지 말고 배상금을 받고 끝내라”고 부탁했지만 샤일록은 “계약서대로 하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법정에서도 판사가 샤일록에게 “꼭 계약서대로 해야 하느냐”고 설득했지만 별 수 없었다. 샤일록이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한 베니스 통치자와 판사 모두 계약을 무시할 수 없었다.
당시 서유럽이 아닌 곳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올 수 있었을까. 조선시대 말 한 외국인 저서에는 자신의 집에서 일하는 조선인 요리사가 한 다음의 말이 담겨 있다.
“내가 여기에서 그만두면 바로 관료들이 나를 찾아와 돈을 빌려달라고 한다. 빌려달라고 하지만, 그 돈은 돌려받지 못한다. 빌려주는 것을 거절하면 나를 감옥에 가둔다. 결국 나는 그동안 내가 모은 돈을 모두 빼앗기게 된다. 내가 서양인하고 일하면 그들은 나를 건드리지 못한다. 하지만 내가 여기를 그만두면 나는 모든 재산을 빼앗긴다. 그러니 계속 여기에서 일하게 해달라.”
양반이 천민과 대등한 계약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일반적이지 않다. 천민과의 계약 때문에 양반이 목숨을 잃는다는 것 역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베니스의 상인의 배경이 조선이었다면 양반은 샤일록에게 “돈을 빌려달라” 하고는 그냥 가져갔을 것이다. 당시 조선은 천민이 양반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 그 자체가 불경스러운 일이었다. 도리어 양반을 모욕한 죄로 천민이 먼저 처벌받았을 것이다.
샤일록은 베니스 통치자가 “계약을 포기하는 것이 어떠냐”고 설득해도 듣지 않았다. 조선에서 사또나 관찰사가 상민에게 “계약을 포기하는 것이 어떠냐”고 했는데 상민이 듣지 않고 계속 자기주장을 하면 어땠을까. 힘이 있는 양반이라면 모를까, 상민이라면 사또의 부탁을 거절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가 됐을 테다. 샤일록이 조선에 살았다면 감히 사또의 부탁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이유로 철저히 보복당했을 것이다.
안토니오 구제한 것은 계약서
만일 재판이 열렸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사또는 “돈을 갚지 않으면 살 1파운드를 가져가겠다니 이런 말도 안 되는 계약이 어디 있느냐”며 계약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계약서보다 정의 구현이 중요하다고 봤을 가능성이 크다. 착한 안토니오는 구제받고 나쁜 샤일록은 벌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베니스의 민사 제도는 그런 식으로 굴러가지 않았다. 민사 제도는 어디까지나 계약서가 최우선이다. 통치자, 법관도 계약서의 효력을 부인하지 못한다. 법관은 당사자 간 계약이 계약서 내용대로 이뤄지는 것을 보장하는 기관일 뿐이다.
조선에서는 정의로운 사또가 “계약을 이용해 상대방을 해치려 하다니 이 나쁜 놈”이라며 샤일록을 벌줬을 것이다. 하지만 베니스에서는 계약서가 최고다. 베니스 법원은 샤일록에게 “계약서대로 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샤일록은 계약서 내용대로 피를 취하지 않으면서 1파운드의 살만 가져가야 했다. 더 나아가 살 역시 정확히 1파운드만 취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많거나 적으면 계약 위반으로 간주됐다. 안토니오가 구제된 까닭은 계약서 덕분이지, 지배자나 판사의 호의 때문이 아니다.
계약서 우선인 서구 사회였기에 샤일록이라는 괴물이 탄생했다. 하지만 계약서 우선인 사회였기에 천민도 귀족과 대등한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고, 귀족도 그 계약서에 얽매여야 했으며, 지배자나 법원도 천민과 귀족을 대등하게 대했다. 샤일록이 나올 수 없는 전근대적인 사회제도보다는 그래도 샤일록이 나올 수 있는 시스템이 더 낫지 않을까.
샤일록은 돈만 아는 고리대금업자만은 아니다. 샤일록은 돈보다 중요한 것이 있고, 신분보다 계약서가 중요하며, 지배자의 정의감보다 당사자인 개인의 의사와 합의를 중요시하는 사회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샤일록은 앞으로도 계속 재해석되는 캐릭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최성락 박사는… 서울대 국제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 박사학위,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동양미래대에서 경영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2021년 투자로 50억 원 자산을 만든 뒤 퇴직해 파이어족으로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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