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가 1976년 1월 내놓은 포니는 한국의 첫 고유 자동차 모델로 꼽힌다. 하지만 포니에 탑재된 엔진은 기술제휴 파트너였던 일본 미쓰비시차의 1238cc 새턴 엔진이었다. 당시 한국은 자동차 핵심 부품인 엔진을 독자 개발할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1982년의 스텔라, 1985년의 엑셀 엔진도 이 회사에서 공급받았다. 기술력이 우위인 미쓰비시차가 주도권을 잡았고 현대차는 한껏 자세를 낮추고 머리를 숙이는 관계였다.
▷미쓰비시차는 1917년 미쓰비시중공업의 사업부로 출발한 뒤 1970년 별도 법인으로 독립했다. 일본 최초의 시리즈 자동차인 ‘Model A’를 선보이면서 일본 자동차산업에 한 획을 그었다. 1990년대 초 거품경제 붕괴의 충격도 이겨냈지만 이후 혁신에 실패해 사세(社勢)가 기울었다. 현대·기아차가 세계 자동차업계 5위로 뛰어오른 반면 10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스승’ 미쓰비시차는 16위로 밀려났다. 차 생산대수는 현대·기아차의 8분의 1에도 못 미친다.
▷메이지 유신 2년 뒤인 1870년 이와사키 야타로가 설립한 미쓰비시는 제2차 세계대전 패전까지 미쓰이와 함께 일본 재계를 대표하는 양대 기업이었다. 두 회사의 기업 문화는 ‘조직의 미쓰비시, 인간의 미쓰이’로 불렸다. 종전(終戰) 후 맥아더 장군의 연합군 사령부는 일본의 침략전쟁 과정에서 군부와 손잡은 ‘재벌 체제’를 해체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주거래은행을 중심으로 예전의 계열사들이 다시 뭉치는 그룹 체제로 변모했다.
▷25년 동안이나 자동차 연료소비효율(연비)을 조작한 사실이 드러나 큰 파문을 일으킨 미쓰비시차가 독자 생존에 실패하고 닛산에 인수됐다. 미쓰비시그룹 계열사 사장단 모임인 ‘금요회’는 2000년 미쓰비시차가 리콜 은폐 사건으로 궁지에 몰렸을 때 ‘미쓰비시 브랜드를 지키자’며 지원했지만 이번에는 손을 들었다. 연비 조작이란 엄청난 사건이 사반세기나 이어졌는데도 ‘회사를 위하는 일’이라는 폐쇄적 집단사고에 갇혀 잘못을 바로잡지 않은 미쓰비시차는 폴크스바겐처럼 소비자를 속이다가 몰락했다.
권 순 활 논설위원 shkw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