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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현진건

Posted August. 09, 2002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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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외환위기 직후 현진건()의 소설 빈처()를 떠올린 사람은 많았다. 국가부도라는 충격에 누구보다 앞길이 막막했던 사람들은 이 시대의 가난한 아내였으리라. 소설 빈처의 여인은 생활비를 위해 친정에서 갖고 온 모본단 저고리를 전당포에 맡기려 한다. 이 소설이 발표된 것은 80여년 전이지만 지금도 살림걱정에 한숨짓는 빈처들은 존재한다. 현진건 소설이 꾸준한 생명력을 갖는 것은 이처럼 서민의 삶과 고뇌를 사실주의적 필치로 담아내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현진건의 문학사적 위치는 갈수록 높아지는 추세다. 그가 1938년과 39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소설 무영탑은 불국사 석가탑을 만든 아사달이 주인공이다. 역사소설하면 지금도 왕이나 귀족들이 단골로 등장하는데 무영탑에서 하층계급 장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빈처에서 시작해 술 권하는 사회 운수좋은 날 등으로 이어지는 작품세계는 그가 일관된 역사의식을 지니고 글을 써왔음을 보여준다.

2000년은 그의 탄생 100년이 되는 해였지만 추모심포지엄만 간단히 열렸을 뿐 쓸쓸히 지나가고 말았다. 대구의 유력한 가문에서 태어나 일본과 중국 유학을 다녀온 지식인이었던 그의 말년은 불우했다. 43세의 나이에 요절한 데다 1936년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 재직할 때는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의 묘소는 서울 서초구에 있었으나 강남개발 바람에 밀려 사라지고 말았다. 유일하게 그의 체취가 간직되어 있는 곳이 서울 부암동의 한옥이다. 이곳에서 그는 닭을 키우면서 무영탑 흑치상지 같은 소설을 썼다고 전해진다.

이 집은 현재 흉가처럼 방치되어 있다. 우리가 그를 위해 한 일은 이 집에 현진건 집터라는 동판 하나를 달랑 붙여놓은 것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기나라 출신 저명 문인들을 소중히 떠받드는 외국의 예를 일일이 열거하고 싶진 않다. 우리의 경우 이미 때를 놓쳤기 때문이다. 작고한 국내 문인들의 생가나 거주했던 집은 대부분 흔적을 감춘 지 오래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 남아있는 것을 보존하려는 노력을 포기해선 안 된다. 현진건 가()는 지금이라도 관계당국이 사들여 기념관으로 만들어야 한다. 문학은 어느 시대든 정신적 상징이다. 문학을 융성시키려면 문인들의 업적을 기리는 데 소홀해서는 안 된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