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깊은 연인 같기도 하고, 대장 같기도 한 이미연에게는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있다.
25일 개봉될 영화 중독에서 이미연의 역할은 죽은 남편의 영혼이 옮겨 붙은 시동생의 구애를 받는 여자. 영혼이 옮겨오는 빙의()로 말한다 치면, 배우들이야말로 다른 영혼을 받아들이는 환각 없이 낯선 삶을 연기할 수 있을까. 평소에도 애잔한 눈빛과 우하하하!하고 터져 나오는 화통한 웃음 사이를 수시로 오가는 이미연의 두 이미지 넘나들기.
30분 동안 혼자 운 사연
중독에서 저는, 관객들이 믿기 어려운 사랑을 믿을 수 있도록 전달해야 하는 입장이거든요. 한 장면 한 장면이 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힘이 들었어요.
이렇게 말하면 남들이 배우 오래한 티가 난다고 놀리지만, 야마 신이라는 게 있어요. 영화에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한 장면을 말하는 건데, 연기를 하다보면 어떤 장면이 야마 신이 되어야 하는지 느낌이 와요. 야마 신 찍는 날은 하루 종일 말을 안하고 극도로 예민해지게 돼요.
중독의 야마 신을 찍을 때, 보통 멜로 영화처럼 클로즈업으로 얼굴 크게 잡고 눈물 한 방울을 주룩, 흘려주는 걸로 설정이 되어 있었는데 그냥 눈물 흘리는 것만으로 표현될 사랑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감독님, 은수(극중 배역)를 이렇게 표현하고 싶지 않아요. 저 울고 나올게요라고 말하고 세트장 안에 혼자 들어가서 은수 생각하면서 30분 울고 나왔어요. 드러내놓고 울지는 않지만 울음기 남아 있는 얼굴과 감정이 필요하다는 느낌이 들어서요.은수는 영혼을 믿는 여자인데, 저도 그래요. 깊게 사랑하는 사람은 보지 않아도 기운을 느끼잖아요.
내가 화통하기만 하면 섬세한 사랑 연기를 어떻게 하겠어요. 아주 예민한 편인데, 남들이 나더러 화통하다 그러면 그냥 혼자 네가 날 알긴 아니 그런 생각을 한다니까요.
어떻게 먹은 나이인데!
나더러 술친구하기에 좋은 스타일이라고들 하는데, 그 말 싫지 않아요. 나는 생과일주스밖에 못마셔하는 여배우들도 있고, 자기 촬영분량만 달랑 찍고 차에 들어가서 앉아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못해요. 주연 배우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현장 분위기가 달라지니까. 나이 들수록 그런 데 대한 책임감 같은 게 더 커지기도 하고.
매니저가 나더러 어려 보이니까 나이를 스물 일곱이라고 해라고 하는데, 내가 미쳤어요? 어떻게 먹은 나이인데! 내가 나름대로 고민하면서 살아온 삶이 나한테 녹아 있다는 거 너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자랑스럽고 당당해요.
저는 선글래스, 모자도 안쓰고 그냥 맨언굴로 극장 가서 영화 많이 봐요. 최근에 본 영화 중엔 라이터를 켜라에서 김승우씨 연기가 너무 좋았어요. 내가 승우를 스물셋에 만나서 서른에 깨졌는데, 지금도 제일 친한 친구예요. 그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다는 인연이 쉬운 일도 아니고, 소중한 거잖아요.
이혼한 뒤 혼자 사는 거, 힘들죠. 가끔 내가 연예인이 아니었더라도 이렇게 되었을까 이혼에 너무 겁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이혼했을 것 같아요. 나는 성격이 아니면 지, 중간은 잘 안돼요. 세모는 잘 못그리는 것 같아.평생 연기하겠다고 호언장담 하고 싶지도 않고, 매 순간에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요즘은 좀 지쳤어요. 이렇게 말하면 주변에서는 지쳐? 니가? 에이, 말도 안돼하는데. 박완서 선생님이 아주 오래된 농담의 작가 후기에서 작품을 만들어내는 게 질릴만큼 고통스러워야 한다고 하셨던 기억이 나는데, 맞는 말 같아요. 그래도 지나고 나면, 고통을 다시 맞는 걸 즐길 수도 있어야 되는데 요즘은 정말로 고통스러워요. 좀 쉴 때가 된 것 같아.
김희경 susan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