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바그다드 티그리스강 동쪽 구() 중심가인 카라데 다클가()의 아보클람 주유소. 굴러가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낡은 세단 차량이 세 줄로 50m가량씩 늘어섰다. 조수석과 뒷좌석엔 빈 기름통이 빼곡하다. 주유 행렬은 15분에 고작 5m씩 느리게 움직였다.
기름값은 L당 15ID(이라크 디나르). 전쟁이 터지기 전보다 크게 오르진 않았지만 절대적으로 물량이 달린다. 다른 주유소들은 거의 문을 닫았다. 이 바람에 기름을 가득 채운 탱크로리는 약탈품목 1위로 떠올랐다.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세계 2위의 원유매장량(1300억배럴)을 자랑하는 이라크가 기름부족에 허덕이다니. 25L 기름통에 기름을 담아 나오는 한 노인은 사담 후세인은 여장()을 하고 달아났다. 그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고생이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원유는 아랍세계의 평균적인 삶의 질을 높였지만 동시에 시민사회의 성숙을 막았다. 원유수입을 독점한 왕가와 권위주의 정권들은 우호계층에 혜택을 주면서 체제 기반을 다져왔다.
후세인 역시 1970년대 이후 급증한 석유수입을 활용해 공무원을 2만명(1958년)58만명(1977년)82만명(1991년)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려 왔다. 이 관료계층이 공화국수비대 등 군조직과 함께 탄탄한 권력기반이 됐다. 전 세계 산유국 중 민주체제가 정착된 곳은 유전이 발견되기 전에 민주사회를 형성한 노르웨이밖에 없다는 보고도 있다.
18일 바그다드 알 쿨라파 거리의 내무부 소속 행정자치국 건물에 불이 났다. 불구경에 나선 아흐메드 알라(27)는 기자에게 미군들이 불을 놓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이유를 묻자 그는 건물이 못 쓰게 되면 재건축할 때 미국 기업이 들어온다고 자신했다.
미영 연합군은 바그다드의 정부종합청사 건물들을 미사일로 공격해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석유부 청사는 수천 발의 폭격에도 멀쩡히 살아남았고, 미군이 가장 먼저 점령했다고 시민들은 믿고 있다.
이라크인들은 이처럼 미국의 전쟁 동기에 잔뜩 의혹의 눈길을 보낸다. 후세인을 쫓아낸 것은 환영하지만 설마 미국이 그 때문에 전쟁을 벌였겠느냐는 생각들이다.
원유를 둘러싼 이라크와 미국의 악연()은 1963년 후세인과 바트당이 일시적으로 권력을 잡았을 때 미국이 배후지원한 데서 시작된다. 1958년 압둘 카심 장군이 원유를 팔면서 식민종주국 영국에 지나치게 많이 양보한다며 쿠데타를 일으키자 미국은 이라크원유회사(IPC)가 국영화될 것을 우려해 후세인을 밀었던 것. 그러나 후세인은 1972년 장기 집권의 서막을 열면서 IPC를 전격 국영화해 미국의 허를 찔렀다.
그 후 후세인은 원유수입의 절반을 군대 및 경찰력 확충에 쏟아 부어 인접국을 위협하는 국방력을 길렀다. 이 점이 미국을 자극해 대량살상무기(WMD) 제거라는 전쟁 명분을 주었다.
이라크 경제는 하루 230만240만배럴에 달하는 원유수출을 빼고 나면 대추야자, 양모 등의 수출이 고작이다. 지금 이라크 국민들의 관심은 원유수입이 어떻게 나눠지느냐에 쏠려 있다. 이번 전쟁 전 이라크는 석유수출액 중 41%를 전쟁배상금 쿠르드자치주 재건비용 유엔 행정비 등으로 떼어내고 나머지를 차지했다.
미국이 원유를 팔아 이번 전쟁의 비용이나 평화유지비를 마련하려는 계획은 이라크인들의 강력한 반발을 살 게 뻔하다. 취재진이 묵고 있는 셰러턴호텔 옆 피르두스 광장엔 이라크의 석유를 이라크인에게라는 현수막과 구호가 요란하다.
1980년대 초까지 중동의 강국을 자처했던 이라크 경제는 8년간에 걸친 이란과의 전쟁과 1991년 걸프전 이후 유엔의 석유금수조치로 기반이 무너졌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과거 중국의 마오쩌둥()이나 옛 소련의 레닌, 리비아의 카다피 국가원수 등이 집권 초 그랬던 것처럼 국가 개조 작업을 낙관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취재진이 만난 대부분의 바그다드 시민들은 미군은 질서가 회복되면 돌아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둘러 친미()정권을 세우는 것이 능사일까. 이라크인에게는 물론 중동의 안정이라는 미국의 중장기 목표에도 득이 되지 않을 성싶다.
박래정 김성규 ecopark@donga.com kims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