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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베이징 6자회담

Posted August. 31, 2003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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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6자회담

남북한과 주변 4강국이 참여한 베이징 6자회담에 대한 북한의 실망감이 역력하다. 북한은 이번 회담이 백해무익했으며 미국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다면 차기 회담에 응하지 않겠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북한은 미국이 대북 적대시 정책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자위적 조치로 핵 억제력을 강화해 나가는 선택 이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1905년 7월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특사 윌리엄 태프트 장군과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조선의 운명을 결정했다. 일본이 조선을 지배할 수 있도록 미국이 묵인하는 대신 일본은 필리핀에 쳐들어가지 않는다는 소위 빅딜을 했다. 또한 영국과 일본은 반()러시아 전선을 공동으로 구축하기 위해 1902년 1월 영일 동맹조약을 맺어 영국의 청에 대한 이권과 일본의 조선에 대한 이권을 서로 보장해 주었다. 조선인의 의지와 능력과는 무관한, 열강의 이러한 묵인에 따라 이른바 한일합병이 강제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달을 즈음 미-영-소-중 연합국 수뇌들은 카이로, 얄타, 포츠담 등 일련의 국제회담을 통해 종전 이후의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를 논의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일제 패망 직후 미국과 소련이 자의적으로 38선을 긋고 한반도를 분할 점령함으로써 현대사에서 우리 민족의 비극의 출발인 분단은 이뤄졌다. 우리 민족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한반도 운명이 우리의 어깨 너머로 결정되어 버렸던 것이다. 주변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지정학적인 여건과 우리의 무력감으로 인해 우리 민족은 언제나 피동체적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한반도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협상에 남북한이 당사자로서 4강들과 맞대고 앉았다. 100년 전, 50년 전의 상황과 비교한다면, 인도차이나 문제와 한반도 문제를 함께 다뤘던 1954년의 제네바회담을 논외로 할 때, 사상 처음으로 한반도 문제에 대해 우리의 손으로 정책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이번 6자회담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첫걸음으로 길고도 험난한 협상과정을 예고하고 있다. 중국과 미국이 적극 개입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의 입장을 반영하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북한은 협상전략에서의 우위를 점하기 위한 압박조치로 회담 불참을 거론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의 운명이 또다시 남의 손에서 결정되는 일이 없도록 반드시 남북한이 함께 참여하고 주도적으로 해결해 나가야 한다. 북한은 평화적 해결의 결단을 내려야 한다.

안 인 해 객원논설위원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

yhahn@kore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