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브리머 이라크 미군정 최고행정관과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이라크에서의 조건부 철군 의사를 언급한 지 하루 만에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발언의 진의를 좀 더 명확히 드러냈다. 6월 30일 이라크에 주권을 이양하더라도 미군 주둔은 계속될 것이라고 밝힌 것이다.
얼핏 보면 엇갈리는 발언의 배경과 속셈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과연 미국은 철군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철군을 말하면서 다른 목표를 겨냥하고 있는 것일까.
이라크 여론 달래기?=이라크 연합군 임시행정처(CPA)의 최근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라크 국민의 80%가 CPA를 불신하며, 82%가 미군 등 연합군 주둔에 반대하고 있다.
이라크 내 반미 감정은 아부그라이브 포로수용소의 포로 학대 사건 이후 극에 달해 있다. 이 때문에 이라크 철군 시사 발언은 거세져 가는 이라크 내 반미여론을 잠재우기 위한 의도적 처방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지난해 10월에도 이라크 과도통치위원회 위원 상당수가 미군정에 불만을 품고 브리머 행정관이 주재하는 회의에 참석하지 않자 부시 대통령은 과도통치위에 더 많은 권한과 책임을 넘기겠다고 말해 이라크 지도층을 달랬다.
연합군은 아부그라이브 수용소에 수감됐던 이라크인 315명을 14일 오후 전격 석방해 이런 분석을 뒷받침했다. 이날 석방은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의 지시로 시행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라크와 유엔에 대한 압력=미군의 계속 주둔 여부는 이라크 주권 이양 뒤 구성되는 이라크 과도정부와 미군의 주둔군지위협정에 의해 결정된다.
파월 장관은 미군 철수 가능성을 시사하면서도 이라크 국민과 이라크 과도정부를 지원하고 보호하기 위해 주둔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연합군이 6월 30일 이후에도 이라크에 주둔하려면 이라크 행정법이 연합군 주둔에 필요한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런 맥락에서 파월 장관의 발언은 철군보다는 주둔에 무게를 둔 것으로 해석된다. 원치 않으면 철수하겠지만 스스로 치안을 담당할 수 있어야 한다며 조건을 단 것이다. 주권을 이양 받는 과도정부가 미국의 생각을 거슬러 철군을 주장할 만큼 자주적인 권한을 갖게 될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된다.
부시 대통령은 15일 이라크 국민이 스스로 자국을 지킬 수 있을 때까지 이라크에 남아 이라크 국민을 도울 것이라고 말해 과도정부의 능력에 회의를 나타냈다.
유엔 끌어들이기?=연합군의 계속 주둔을 위해서는 새로운 유엔결의안이 필요하다고 한 파월 장관의 발언은 미군의 계속 주둔 여부와 유엔의 개입을 맞물리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14일부터 16일까지 모스크바를 방문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면담하고 부시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새로운 이라크 결의안을 추진 중인 미국은 러시아의 지지를 필요로 하고 있다.
러시아는 지난주 프랑스와 이라크 사태에 대해 공동보조를 취하기로 약속하며 모든 안보리 이사국이 합의한 결의안만을 지지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미국은 유엔 안보리 결의에 의한 다국적 평화유지군의 이라크 파병에 대해 러시아의 의사를 타진한 것으로 전해졌다. 러시아는 7월 1일 출범하는 이라크 과도정부가 선거까지 한시적으로 이라크를 통치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고, 평화유지군의 일정이 미리 정해진다면 파병 자체에 반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주성원 sw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