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11월 1일 북아프리카 알제리 동부의 한 마을에서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던 프랑스인 부부가 살해됐다. 버스에 타고 있던 부부를 무장괴한들이 끌어내려 현장에서 총살한 것이었다. 비슷한 시간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60여 곳에서 폭발물을 이용한 공격이 일어나 1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모두 알제리를 식민통치하고 있던 프랑스인들을 겨냥한 공격이었다. 이날 감행된 일련의 공격은 알제리인들이 독립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일 알제리에서는 독립전쟁 개시 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밤하늘을 수놓은 불꽃놀이 아래로 축포가 울려 퍼지고 차량들은 경적을 울렸다. 알제리 국민으로선 120여년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게 된 시발점이었으니까 자축할 만한 날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는 외부인의 시선에는 축하와 함께 우려가 교차했다. 알제리의 과거 모습과 오늘날 이라크의 현실이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알제리전쟁과 이라크전쟁은 여러모로 닮은꼴이다. 우선 이슬람 무장세력이 조직화된 군대와 대치하고 있다는 점이 똑같다. 알제리에서 독립전쟁을 이끌었던 민족해방전선(FLN)은 정규전을 피하고 게릴라전과 암살, 폭발물 공격으로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는 전략을 썼다. 프랑스에 협력하는 알제리인은 같은 동포라도 무차별 공격했고 이 과정에서 참수도 서슴지 않았다. 당황한 프랑스 군대는 정보를 캐내기 위해 알제리인 포로들을 고문하다 장 폴 사르트르를 비롯한 프랑스 지식인들의 거센 반발에 부닥쳤다. 프랑스에서는 전쟁에 대한 찬반()으로 국민 여론이 양극단으로 갈라졌다.
전쟁은 100만명이 넘는 희생을 치르고 8년 만인 1962년에 끝났다. 더 전쟁을 끌어 봐야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샤를 드골 대통령은 협상 끝에 프랑스의 철수를 선언했다. 사실상 항복을 한 것이다. 드골 대통령으로선 전쟁으로 불어나는 경제적 손실도 더는 방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알제리전쟁은 빈약한 무기를 갖춘 이슬람 전사(무자헤딘)가 막강한 전력의 서방 군대에 맞서 이긴 최초의 사례로 꼽힌다. 미국은 어떨까. 프랑스의 전철을 밟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역사를 기록할 것인가.
파리=금동근특파원 go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