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찬 국무총리가 불법감청(도청)에 개입한 전직 국가정보원장의 사법처리 수위를 사전 조율하려 한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13일 김대중 전 대통령을 찾아가 임동원, 신건 전 원장의 불구속 가능성을 언급하며 정치적 거래를 시도했다는 것이다. 이 총리는 두 사람이 적절한 선에서 유감을 표명하면 불구속 할 수도 있다는 뜻을 전하고 DJ의 협조를 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구속영장은 검사의 청구에 따라 법관이 발부하도록 헌법과 관련 법률에 명시돼 있다. 구속 여부의 판단기준 역시 헌법과 법률이다. 알려진 대로라면 이 총리의 행위는 검찰의 정치적 중립은 물론이고 사법부의 권한까지 침해한 명백한 헌법위반이다.
이 총리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DJ 측이 도청 개입사실을 잡아뗐고, 법원이 증거 인멸을 우려한 검찰의 청구를 받아들여 영장을 발부했지만 만약 DJ 측이 흥정에 응했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검찰에 온갖 압력을 넣고, 그것도 통하지 않았으면 법무부 장관이 또 불구속 수사하라고 지휘권을 발동했을 것 아닌가.
노무현 정부는 기회 있을 때마다 검찰, 국정원, 국세청, 감사원 등 권력의 수단이 될 수 있는 기관을 모두 제 자리로 돌려보냈다고 강조해 왔다. 그러나 헌정사상 유례가 없었던 천정배 법무장관의 강정구 사건 수사지휘권 발동과 이 총리의 이번 헌법위반행위를 보고도 그런 말을 믿을 국민은 없을 것이다.
더구나 이 총리가 DJ를 찾아가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정부가 조직적으로 움직인 흔적이 뚜렷하다. 천 장관이 노 대통령에게 수사상황을 보고하고, 이틀 뒤 이 총리가 DJ를 방문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도청을 뿌리 뽑았다고 국민의 박수를 받고, 호남 민심도 놓쳐선 안 된다는 정권의 이중셈법에 총리가 뛰어든 것이다.
검찰의 책임도 크다. 임 씨와 신 씨가 도청 개입을 인정하면 불구속 수사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은 검찰의 잠정 결론이기도 했다. 법무장관에게 이런 수사상황을 낱낱이 보고해 정권 차원에서 방어에 나서도록 한 것은 검찰 중립성을 스스로 훼손한 일이다.
청와대와 이 총리 측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발뺌할 것이 아니라 정치적 흥정의 전모를 밝히고 헌법위반행위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