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한반도를 강제 점령한 1910년 조선 거주 일본인은 17만 명이었다. 1700만 명으로 추산된 조선 인구의 1%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조선에서 일본어 신문은 16개나 발행됐다. 반면 우리말 신문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와 경남일보뿐이었다. 그나마 발행부수가 둘 다 3000부를 넘지 못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이듬해 일제가 문화정치라는 이름으로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사신문 3개지의 창간을 허용할 때까지 한반도는 언론의 암흑기였다.
일제 치하 우리 신문들이야말로 토머스 제퍼슨이 말한 정부 없는 신문이었다. 신문들은 정부를 잃은 조선인을 위해 정부 역할을 대신 떠맡아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졌다. 그래서 동아일보 조선일보가 수행한 다른 과제가 교육과 계몽이었다. 민립()대학 설립, 문맹퇴치 운동이 대표적이다. 1920년대엔 신춘문예를 신설해 국어 상실의 위기 속에서 우리글을 가꿔 나갔다.
신문들은 서구에서 전개되는 지성()의 흐름을 소개하는 데도 열심이었다. 앞선 지식을 알려 내부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유럽에서 조선인 최초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던 이관용은 1922년 10월 동아일보 1면에 사회의 병적 현상이란 제목으로 16번에 걸쳐 서양 학계의 연구 동향을 자세히 소개했다. 그는 연희전문 교수를 거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로 일했다.
일제강점기 우리 신문들이 게재한 철학 관련 기사를 조사해 온 영남대 한국근대사상연구단이 작업을 마무리했다. 이들이 찾아낸 철학 기사는 동아일보 1154건, 조선일보 1456건 등 3427건에 이른다. 철학뿐 아니라 인문학 전반에 걸쳐 수준 높은 글을 실어 지성사를 이끌었다. 신문이 없었다면 일제강점기 지성도 없다는 게 조사의 결론이다. 여러 역할을 수행했던 정부 없는 신문이 얼마나 힘든 길을 걸었는지는 일제강점기 동아일보가 판매금지 63회, 압수 489회, 삭제 2423회를 당했던 것에서도 드러난다. 정부는 되찾았으나 신문 없는 정부를 바라는 세력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민주화 20년에.
홍 찬 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