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이 끝난 뒤 북의 김일성 주석이 다시 남조선 적화통일 준비에 나서게 된 직접적 계기는 1965년 박정희 정부의 월남() 파병이었다. 와다 하루키 일본 도쿄대 명예교수는 (당시) 북조선의 최대 관심은 베트남에 호응해 남조선 혁명을 추진하는 것이었다고 저서 북조선(2002년)에 적고 있다.
미국과 북베트남의 전쟁은 1975년 호치민의 승리로 끝났지만 이후 상황은 김일성의 기대를 저버렸다. 북베트남은 전쟁 승리 직후 이웃 캄보디아를 침공하는 등 한동안 선군() 정치로 내달렸다. 그러나 1986년 도이 모이(Doi Moi쇄신) 정책을 도입하면서 개혁개방의 신작로를 닦기 시작했다. 한국(1992년) 미국(1995년)과의 국교 정상화, 그리고 2006년 11월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도이 모이는 세계화로 이어졌다.
지난해 베트남의 경제성장률은 8.2%. 올해 외국인 투자 유치액은 지난해의 두 배인 200억 달러에 이를 전망이다. 응웬 싱 훙 부총리는 어제 세계경제포럼(WEF) 동아시아 회의에서 지금 추세대로라면 2020년엔 중진국 대열에 합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무엇보다 하루 2달러도 못 버는 빈곤층이 2001년 62%에서 지난해엔 36%로 줄었다. 프랑스의 석학 기 소르망이 세계화는 다수의 대중을 빈곤에서 벗어나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말한 그대로다.
응우옌민찌엣 베트남 국가주석이 6일간의 역사적인 미국 방문을 그제 마쳤다. 국가주석으로서는 종전 후 첫 방미였다. 양국간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의 토대도 마련했다. 미국에 역사상 최초의 패배를 안겨준 베트남이 지금은 미국을 이용해 다시 국가성공 신화()를 쓰려 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 역시 2차 대전 후 미국과 전쟁을 치른 몇 안 되는 나라 중의 하나다. 그러나 북은 아직도 미 제국주의를 외치며 오로지 핵으로 체제안전을 보장받으려 하고 있다. 암시장에서 통용되는 달러화 시세로 환산한 북 주민의 임금은 월 1달러 안팎이다.
김 창 혁 논설위원 c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