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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아편 전쟁과 메이지 유신 (하)

Posted July. 19, 2007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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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으로 혼란스런 가운데 왜 대만 출병을

메이지 유신은 두 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산업과 인재를 길러 중앙집권국가를 만들고자 한 국내개혁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후에 군국주의로 이어지는 해외 출병이다. 전자의 국내개혁은 중국과 조선도 배우게 되지만, 후자는 동아시아를 혼란에 빠뜨리게 했다.

일본이 국내 개혁을 시작하자마자 곧바로 해외 침략으로 향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대답을 찾기 위해 대만으로 향했다. 근대 일본에 있어서 최초의 해외 파병은 한반도도 중국 대륙도 아닌, 당시 세다이()의 에키()라고 불리던 대만 출병이었다.

6월 4일, 대만 남부의 무딴() 마을(출병 당시는 무딴사())은 눈부신 남국의 햇살 아래에 있었다. 1874년 5월, 유신의 영웅 사이고 다카모리(郷)의 동생인 육군 중장 사이고 쓰구미치(郷従)가 인솔하는 3600명의 일본군이 이곳으로 쳐들어 왔다.

이번 취재 중에 때마침 대만 출병을 회고하는 심포지엄이 무단에서 열리고 있었다. 현지의 관공서가 주최한 행사로 100여명의 참석자 중에는 원색의 민속 의상을 입은 선주민 파이원족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조상과 깊은 관계가 있는 전쟁의 진상을 알고 싶어 모인 것이었다.

파이원족인 리찐쇼이( 87세) 씨는 조부로부터 싸웠던 경험을 들으면서 자랐다. 산 위에서 총으로 일본군을 공격했다고 합니다. 총알이 떨어진 잠시 후, 쓰러졌다고 생각했던 일본 병사들이 다시 일어나 당황한 나머지 서둘러 도망쳤다고 합니다.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이 전투는 일본에서는 거의 잊혀져 버렸지만, 대만에서는 어떨까.

역시 파이원족이며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인 두시윤( 33세) 씨는 대학 시절 노인들에게 증언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자세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알고 있어도 입을 굳게 닫을 뿐

1949년, 중국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한 국민당이 대만으로 도망쳐 왔다. 그 정권 하에서 선주민족의 역사는 어둠 속에 매장당해 버렸다. 민주화가 진행된 지금에서야 겨우 그 지워진 역사에 빛을 비추려는 기운이 높아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일본군은 왜 대만에 출병했을까? 발단은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미야코()섬의 공무원 등을 살해 / 정벌 을 명목으로 출병

류큐( 지금의 오키나와현(縄県)) 미야코섬의 공무원 등 69명이 탄 배가 악천후 때문에 대만에 표류하게 되었다. 그 중 54명이 파이원족에게 살해 당했다. 정중한 대접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망쳤기 때문에 적이라고 판단했다.고 현지에는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생각은 달랐다. 살해자들을 응징하고, 잘하면 그곳을 일본이 소유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출병이 행해 졌다.

정부 내에서는 반대론이 적지 않았다. 실력자의 한 명인 기도 다카요시(戸)는 항의의 표시로 참의라는 정책결정직을 그만 두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야말로 무모한 출병이었다. 전투에서 일본 측의 사망자는 12명이었으나, 말라리아 등으로 500명 이상이 병사했다. 사전 조사가 불충분했을 뿐 아니라 군의관과 의약품도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상대를 항복시켰다고는 해도, 현지의 군간부가 너무나 비참해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고 편지에 쓸 정도였다.

무엇보다, 대만은 중국(당시, 청나라)의 영토였다. 그곳에 출병을 하면, 청이 잠자코 있지 않을 것은 당연하다. 20년 빨리 청일 전쟁이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도 왜 출병을 단행한 것일까.

이 의문을 연구해 온 오사카() 시립대 명예교수인 모리 도시히코() 씨는 당시의 최고 실력자 오쿠보 도시미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

오쿠보는 출병하기 전에 정한론()(키워드 참조)을 둘러 싼 정변으로 실권을 쥐었다. 하지만 큰 오산이 있었다고 모리 씨는 말한다. 같은 가고시마 출신의 맹우로 덕망이 높았던 사이고 다카모리(郷)가 오쿠보와 대립하여, 참의(参)를 그만 두고 고향으로 가 버린 것이었다.

인기가 없는 정권이 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눈에 보이는 성과를 올릴 수 있는 것은 내정보다는 외정이다. 당시에도 이미 대만 출병은 검토되고 있었다. 오쿠보는 하는 수 없이 출병을 추인한 것이라 전해지지만, 시종일관 출병에는 적극적이었다는 것이 모리 씨의 설이다.

한편, 발의한지 얼마되지 않은 징병령에 대해 병역을 싫어하는 농민들이 일치단결하여 격렬한 반대 운동을 일으켰던 것도 간과할 수 없다. 징병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현실을 강조하기 위해, 정부가 대외 전쟁으로 기울었다고 보는 연구자도 있다.

농민만이 아니다. 정한론의 정변에 분노한 고치현(県)의 사족( 메이지 유신 후, 무사 계급에게 부여된 칭호)이 오쿠보와 함께 정부를 좌지우지하던 이와쿠라 도모미()를 습격한 사건이 일어 났다. 드디어 불만을 밖으로 돌리지 않으면 정권이 위험에 빠질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었다.

게다가, 불만을 표시하는 사족 중에서 최강을 자랑하는 가고시마(児)의 사쓰마번()은 대만 정벌에 열심이었다. 사쓰마는 에도 시대 초기부터 류큐를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그들 류큐 주민들에 대한 살해 사건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사이고 다카모리 휘하의 300명 정도가 대만 출병에 참가하였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류큐는 청에도 사절을 보내어 중국과 일본의 양속(両属)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또한 청과의 대립점이 되지 않을 리 없었다.

배상금 지불한 청 / 전쟁의 불씨가 되다

중국 텐진 사회과학원에서 일본 연구소장으로 근무한 뤼완흐어() 씨는 매우 모험적인 군사 행동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오쿠보는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라고 말한다.

오쿠보는 베이징에 가서 청과의 교섭에 임했다. 오쿠보 도시미치 일기() 등에서 경과를 살펴 보면, 난항을 겪은 모습을 잘 알 수 있다.

만국 공법(국제법)에 비춰 봤을 때, 출병지에 청나라의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다, 아니 청나라 식의 방식으로 통치하고 있다. 라고, 프랑스인 법률고문인 보아소나드(Boissonade)의 지혜를 빌려 국제법에 의거해 논지를 펼친 오쿠보에 대항하여 청은 청일 수호 조약을 지키지 않을 것인가라고 반박하였다.

청일수호조약은 그 전년에 발효되어 아직 얼마되지 않은 조약이었다. 어쩔 수 없이 구미와 불평등 조약을 맺어던 일본과 청으로서는 처음으로 맺은 대등한 조약으로, 서로의 국토를 침범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결국, 현지 영국 공사의 중재로 청이 50 만량을 지불하고 일본의 출병을 백성을 보호하는 의거였다고 인정하는 대신에, 일본은 철병했다. 청나라 정부는 군사 행동도 둔했고, 외교력도 약했다. 오쿠보는 교섭을 통해 실패를 승리로 바꾸어, 명예를 만회했다고 뤼완흐어는 말한다.

청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에 배신당했다는 생각이 강했을 것이다. 일본을 같은 편으로 끌어 들이면, 구미에 대항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여 청일수호조약 체결을 진행했던 실력자 리훙장()은 구미는 아무리 강하다 해도 아득히 먼 곳에 있지만, 일본은 대문앞에서 우리를 엿보고 있다. 중국에게는 영원히 큰 근심거리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후, 청은 일본을 가상 적국으로 간주하고 군비 확충을 서둘렀다. 모리씨의 말을 빌리면, 이 시점에서 청일 전쟁의 불씨가 생긴 것이 된다.

청에 입장에서는 류큐인을 일본의 백성이라고 인정했던 것이 최대의 실패였다. 일본 정부는 그 다음해부터 청에게 바치는 조공을 폐지하라는 명령을 류큐에 내렸고, 4년 후에는 류큐번을 오키나와현으로 바꾼다. 완벽하게 일본의 일부로 삼았던 것이다.

오랫동안 중국과 종속 관계를 맺어 온 류큐가 화이질서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중화 체제가 붕괴해 가는 첫 단계라는 의미가 크다고 오키나와 대학의 마타요시 세이쿄(清) 교수는 말한다.

당시 중국에서도 조공국이 전부 무너져 간다고 위기감을 가진 사람은 있었다. 청일수호조약에 의거하여 청나라에서 부임해 온 초대 일본 공사인 허루장()은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본국에 보냈다.

류큐가 망하면, 조선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다음은 조선 / 포대를 군함이 도발

그것은 현실이 되고 있었다. 그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서울로 향했다.

인천 국제공항은 영종도에 있다. 1875년 9월, 이 섬은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30여명의 주민이 살해당했다. 근처 강화도에 있던 포대를 일본의 군함 운요호가 도발해, 포격전이 벌어졌던 것이 그 계기였다.

이 강화도 사건(한국에서는 운요호사건)을 이유로, 일본은 조선에 한일수호조약이라는 불평등 조약을 맺게 하고 개국을 강요하였다. 일찌기 일본이 미국의 페리 함대에게 당한 것과 같은 일을 조선에게 했던 것이다.

강화도도 당시와는 모습이 바뀌었다. 운요호를 공격한 포대의 흔적인 초지진은 전망대가 되어 있었다. 관광 버스와 승용차가 끊임없이 들어 왔다. 문화 관광 해설가인 박성옥() 씨는 여기는 한국이 근대와 만난 장소입니다, 지금은 서울에서 가까운 관광지입니다라고 설명했다.

강화도 사건에 대해, 근년에 새로운 발견이 나왔다. 지금까지 알려진 운요호 함장의 보고서보다 더 먼저 쓰여진 함장의 보고서가 일본의 방위연구소 도서관에서 발견되었다.

운요호는 물 보급을 목적으로 접근하였고, 일장기를 달고 있었음에도 포격을 당했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보고서에 따른 일본 측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새로 발견된 보고서에는 물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새로운 역사 자료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연구자 이태진(鎮)울대(서울대) 교수를 만나 보았다.

지금까지의 보고서는 사실 관계를 알고 싶어 하는 영국 공사를 만나기 전날에 고쳐 쓴 것입니다. 다음날에는 프랑스 공사에게도 보여주었습니다. 조선은 국제법도 모르는 야만스러운 나라라는 이미지를 심어, 영국과 프랑스를 아군으로 삼고 싶었겠지요. 조약 교섭을 유리하게 진행하기 위한 공작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일본 정부에는 보아소나드(Boissonade) 뿐만 아니라, 프랑스계 미국인인 르장드르(Le Gendre)처럼 대만출병 시에 장래에 일본이 대만을 영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는 등의 바람을 넣은 외국인 고문도 있었다.

이 교수는 앞에서 이야기한 강화도사건과 조약에 관한 정설에 의문을 가지고 있다. 쇄국 정책을 펴던 조선을 일본이 개국시켜 혜택을 주었다는 것은 그 후에 한국병합을 강행했던 일본 측의 주장이 아닌가라는 것이다.

강화도사건이 있기 2년 전, 당시 22세가 된 조선 국왕 고종은 직접 정치를 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국제 대응에 능숙하지 않으면 살아 남을 수 없다. 개국은 피할 수 없다. 고종은 그런 개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이 교수는 지적한다. 또한 고종은 개화에 일본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조약 체결에도 적극적이었다. 조선에는 개국 의사가 있어으며, 쌍방의 합의로 이루어진 것이 강화도 조약(한일수호조약)이다라고 말했다.

그 후의 대립은 차치하더라도, 조약을 맺을 때는 합의가 있었다는 취지이다.

조약에는 조선은 자주국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되어 있다. 청의 종주권을 부정하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는 뒷날 청일전쟁(중국에서는 갑오중일전쟁) 개전의 구실이 된다. 청일전쟁에 대해서는 다음번 특집에서 다루기로 한다.

구마모토 신이치 隈, 니시 마사유키 , 사토 가즈오

메이지 유신

에도 막부와 각각의 번이 통치하고 있던 정치 체제를 무너 뜨리고, 새로운 중앙 집권 국가가 여러가지 개혁을 행한 것을 말한다. 폐번치현(廃県 번의 폐지, 현의 설치)과, 구미를 모델로 한 징병 제도, 식산 흥업 정책이 도입되었으며, 그 외에 교육 제도와 세금 제도도 발본적으로 바꾸어, 근대적인 국가 형성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개혁은 주변국에도 자극을 주었다. 예를 들어, 중국(당시, 청나라)에서는 청일 전쟁(중국에서는 갑오 중일 전쟁) 후, 캉유웨이(為) 등이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한 정부 기구의 개혁과 인재등용을 추진하였다. 이 개혁은 103일만에 좌절되고 말아 백일 유신이라고도 불린다.

정한론

조선에 파병하여 정복한다, 또는 조선에 정치 체제의 변혁을 강요하려는 주장. 에도 막부 말기와 메이지 초기에 정부 안팎에서 논의되었다. 메이지 신 정부가 들어 서자, 조선 측은 일본으로부터의 외교 문서가 막부 시대의 형식과 다르다는 것을 이유로 국교를 거절하였다. 게다가 1873년 5월, 조선이 부산에 있던 일본 측의 체재용 시설의 문 앞에 일본을 모욕하는 글을 게시했다는 보고가 전해 졌고, 참의(参)였던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내각 회의에서 거류민 보호 명목으로 파병을 주장하였다. 한편, 사이고 다카모리(郷)는 파병에 반대하며 자신을 대사로 파견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타가키 등이 찬성하여 일단, 사이고의 파견이 결정되었으나, 천황에게 결정 사항을 보고한 이와쿠라 도모미()가 파견을 인정하지 않도록 요구한 관계로, 내각 회의에서 정식 결정되었으나, 파견이 중지되는 이상사태가 발생하였다.

기억을 만드는 것

나라의 이미지나 역사 사건에 대한 우리의 집단적인 기억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화제를 부른 중국의 TV프로그램에 대해서 알아 본다.

메이지 유신의 신 이미지

중국TV방송-냉정하고 올바르게 일본의 모습을

고이즈미 준이치로(郎) 수상의 야스쿠니 참배 등으로 인해, 최악의 상태가 되어 버린 중일 관계. 올 4월 원자바오(温宝)수상의 방일에 대해 중국 측은 얼음을 녹이기 위한 여행 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 직후에 중국 사회과학원이 베이징과 상하이 등의 주민 천명을 대상으로 대일관에 대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일본에 대해 친밀감을 느끼지 않는다 약간 친밀감을 느끼지 않는다라고 대답한 사람이 60%를 넘었다. 그 이유로 7할의 사람들이 역사 인식의 차이를 들었다.

조사를 진행한 책임자는 중국에서의 대일 이미지 형성을 연구하는 류치밍() 중국 사회과학원 미디어조사 센터장이다.

중일전쟁, 침략 국가, 잔학 행위. 이러한 대일 이미지에는 텔레비전 등의 영상이 압도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설명한다. 류 센터장이 일본을 묘사하는 방법으로서는 획기적이라고 평가한 TV프로그램이 작년 11월에 방송되었다.

중국 중앙TV(CCTV)의 역사 다큐멘터리 대국굴기(国崛)(대국의 대두란 의미)이다. 미국, 러시아 등 9개국의 근대화 과정을 전 12회(1회, 약 50분)에 걸쳐 제작 방영한 것이다. 급속하게 경제 발전을 하고 있는 중국이 진정한 대국이 되기 위해 필요한 교훈에 관한 프로그램이다.

백년 유신()이라는 제목이 붙은 일본 편은 평론가인 가토 슈이치()를 비롯한 일본과 중국 지식인들의 코멘트를 삽입하여, 1853년 외국 함선의 내항에서부터 전후의 발전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역점을 둔 것은 메이지 유신이었다. 류 센터장은 중국인에게 있어 메이지 유신은 군국주의의 대두를 상기시키기 때문에 거기에는 결코 긍적적인 이미지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일본편은 메이지 유신 시기의 산업 육성과 해외 문화 수용 등을 소개하고 있다. 제2차 대전의 패전으로부터의 재건도 메이지 유신 시기에 틀이 잡힌 인재육성 제도 등의 소프트 파워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등장 인물은 변혁 시대의 리더였던 오오쿠보 도시미치(), 산업 육성의 관점에서는 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栄), 국가 제도의 구축이라는 관점에서 이토 히로부미() 등 3명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한편, 중국 등으로의 침략 전쟁의 역사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에 머물렀다.

베이징 주재 일본대사관 홍보문화 센터장인 이데 게이지() 공사는 현재 체제 하에서는 미묘한 테마인 자유민권 운동까지 다루었다. 중국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다라며, 이 프로그램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관계자에 의하면, 프로그램 제작의 발단은 2003년 11월 공산당 정치국이 역사학자를 불러 개최한 스터디 그룹이라고 한다. 테마는 15세기 이래, 대국의 발전사였다. 이러한 움직임을 알게 된 CCTV 측이 프로그램 제작에 나섰던 것이다.

많은 역사학자의 협력 아래, 2004년 초부터 준비하여 방송까지는3년 가까이 걸렸다. 일본에 유학한 경험 덕분에 일본편 제작에 참가한 왕커리() 씨는 지금까지 일본을 묘사할 때는 전쟁이 부각되어 왔다. 이번 프로그램에서는 냉정하게 올바른 일본의 모습을 냉정하게 전하도록 유의했다고 말했다. 가장 절실하게 전하고 싶었던 것은 외국 문화를 배우고 받아 들이려는 강한 의욕이었다.약 1년 10개월에 걸쳐, 정부의 중심 인물들이 구미를 시찰한이와쿠라 사절단()은 상징적인 존재라고 강조했다.

CCTV는 80년대 후반에도, 서양 문명과 대비하여 중국 근대화의 길을 모색한 역사 다큐멘터리 허상(殤)을 제작한 바 있다. 그러나 그 후, 당국으로부터 방송 금지 처분을 받아, 아직까지도 중국 국내 텔레비전에서는 볼 수가 없다.

베이징 대학의 송청요() 교수(일본사)는 하상에서는 정치적인 메시지가 강했지만, 이번 대국굴기는 역사적인 사실을 전하는 것에 역점을 두고 있다. 또한 당시와는 개혁•개방의 진전 상황이 다르다고 지적하면서, 지금 중국은 글로벌리제이션에 어떻게 대응해 나갈지의 갈림길에 서 있다. 메이지 유신의 무엇이 참고가 될지. 일본을 재발견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프로그램은 DVD와 책으로도 제작되어 중국 서점에서는 가장 눈에 띄는 곳에 진열되어 판매되고 있다. 평판은 국내에 머무르지 않았다. 한국의 교육 방송은 역사가 객관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한국에서도 참고할 수 있다(담당자)며 방송권을 구입해 올 1월부터 2월에 걸쳐 방송하였다. 대기업인 삼성전자에서는 간부가 사원에게 DVD의 시청을 권하는 등, 방송 직후 반향이 컸다. 시청자들의 강한 요청으로 6월 25일부터 재방송이 결정되었다.

한국 연세대학의 백영서 교수( 중국 현대사)는 중국의 역사 연구와 교육에서는 최근에 애국주의와 다원적 역사관이 2대 조류를 이루고 있다. 중국을 위해서 외국의 역사를 배우자라는 대국굴기에는 그 두 가지가 서로 중첩되어 있다라고 분석하며, 일본에 대해 반일만을 내세울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측면을 배우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니시 마사유키

미니 칼럼

아편 전쟁 영화-전시 중을 그린 오락 대작

아편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는 많지는 않지만, 화제작은 몇 개가 있다.

근래에는 부용진() 등으로 알려진, 중국의 거두, 셰진() 감독이 찍은 아편 전쟁(戦争)(1997년)이 있다. 홍콩 반환에 맞추어 제작되어, 아시아 각지에서 공개되었다. 제작비는 당시, 중국 최고의 1억위안(약 121억원)이었고, 2만 상자가 넘는 아편 폐기 장면에 3천명의 엑스트라를 동원하는 등, 그 스케일이 화제가 되었다.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영국 여왕 역에는, 고 다이아나 전 황태자비에게 출연 교섭을 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이 외에도, 1950년대 후반 작품으로, 명배우인 쟈오탄()이 주연을 한 린쩌쉬()가 유명하다.

일본인 마키노 마사히로() 감독에 의한 아편 전쟁(1942년)은 독특한 작품이다. 전시 하의 사회상을 반영하여, 영국에 반대하는 시점에서 묘사된 한편, 뮤지컬적 요소도 도입한 오락 대작이었다. 배우는 모두 일본인으로, 히라 세쓰코()와 다카미네 히데코()가 자매로 출연했다. 음악은 핫토리 료이치()가 담당했으며, 와타나베 하마코(辺)가 부른 주제곡 바람은 바다로부터가 오랫동안 불려 졌다.

또, 같은 해 만주 영화 협회와 중국 영화 회사와의 합작으로, 린쩌쉬()의 활약을 그린 만세류방()도 만들어 졌다. 당시 리샹란 ()이란 이름으로 활약한 만주 영화의 스타였던 야마구치 요시코 )가 출연했다. 쉽게 접할 수 없는 작품이었으나, 2005년 도쿄 교바시()에 있는 도쿄 국립 근대미술관 필름센터에서 61년만에 상영되었다.

-시리즈 지식인 20명에게 듣는다 동아시아 근현대사의 10대 사건은?

미국을 비난하는 것은 간단하지만-안토니 베스트 박사, 런던 정치경제 대학원LSE

일본의 근대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나는 1863년에서 64년에 걸친, 영국 함대에 의한 가고시마(児) 포격(살영() 전쟁)과 4국 함대에 의한 시모노세키(関) 포격(바칸(関) 전쟁)의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 페리의 내항 시점에는 서양을 축출하자는 생각이 아직 일본에 남아 있었지만, 급진파들은 두 전쟁을 통해 외국 세력을 무력으로 축출하기에는 일본의 힘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고, 결국 개국을 결정하였다.

일본과 한반도의 관계를 생각할 때, 중요한 전기는 조선의 근대화를 시도한 개혁파 김옥균()의 쿠데타와 그 실패일 것이다. 김옥균 등은 일본 정부의 암묵적인 지지에 의지하여 궐기했지만, 결국 배신을 당했다. 이후, 조선의 내셔널리스트는 반일파가 되었다. 일본은 군사 지배를 한층 더 강화하여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악화 일로를 치닫게 된다.

러일전쟁의 승리와 1905년의 포츠머스 조약은 일본에 대국 의식을 가져왔고, 영국과 미국에서는 대일 불신감이 싹트게 되었다. 같은 해에 맺어진 베이징 조약에 의해 중국 철도의 일부가 일본의 지배 하에 놓인 것은 후에 만주국 건설과 중국 침략으로 이어졌다.

세계 대공황은 1930년대의 세계를 규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농촌의 피폐를 낳았고 도시의 실업자를 증가시켰다. 그러한 불만이 정당 정치의 토대를 파괴하여, 군부의 대두를 가능케 하였다. 세계적으로는 보호주의적인 경제 블록화를 부르는 가운데, 일본은 만주 등에서 권익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생존을 도모했다.

중일전쟁의 발발 자체는 우발적인 충돌이 계기였다.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이를 기회로 원료의 자급을 위해 중국을 침략한다는 일본의 의도를 넘어서, 결국에는 히틀러의 독일과 자유세계의 전면 대결로 상징되는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그 일익을 담당했던 전략적 문제에 직면했다는 점이다.

원폭 투하라는 중대사는 논할 필요조차 없다. 전후 연합군에 의한 일본 점령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일본 사회에 다원주의를 가져온 점에 있다. 노동조합의 권리와 여성 참정권, 민주적인 선거제도, 그리고 헌법 9조 등이 대표적이다. 미국을 비난하는 것은 간단하지만, 그들은 상당히 안정된 전후 일본을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학생들은 종종 보수 합동으로 자민당이 탄생한 1955년과 미일안보조약 개정으로 혼란했던 1960년 중에서 어느 쪽이 중요한지를 묻곤 한다. 나의 대답은 60년이다. 안전 보장을 축으로 보통 국가를 지향한 초기의 기시() 노선은 요시다 시게루()의 노선을 계승한 이케다() 정권의 소득배증 노선으로 교체되었지만, 1960년은 이 두 조류의 교차점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닉슨의 방중으로 미중 관계에 이어 중일 관계가 개선됨으로써, 일본과 중국이 최대의 무역 파트너가 되는 길을 열었다. 1985년의 플라자 합의가 없었다면 엔고()와 투기열에 의한 일본의 버블 경제는 없었을 것이고, 버블 경제가 없었다면 90년대의 경기 후퇴도 없었다. 현대사에서는 정말 중요한 전환점이 아닌가.

일본의 근대에서 흥미로운 점은, 일본 정치제도의 정상에 있던 이토 히로부미()와 마쓰카타 마사요시() 등의 원로가 정치의 지침을 내리는 동안에는 메이지 헌법체제가 그 기능을 다 했지만, 그들이 죽자 내각, 추밀원, 의회, 육•해군의 권위 서열이 불명확해졌다는 것이다. 메이지 헌법 체제의 본질적인 문제이다.

서구 열강들은 제국주의적인 세계 지배를 마음껏 해 놓고, 일본의 침략 행위를 비난하는 것은 위선이라는 논의가 있다. 비록 서구 열강의 태도가 위선적일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의 행위를 정당화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터뷰:기무라 다다카즈

안토니 베스트 (Antony Best) 의 약력

1964년 영국 출생. 근현대 일본과 동아시아의 관계사가 전문이다. 특히, 태평양 전쟁에 이르기 까지의 역사 과정 분석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안토니 베스트 씨의 내가 선택한 10 대 사건

영국 함대에 의한 가고시마(児) 포격(살영() 전쟁)과 4국 함대에 의한 시모노세키(関) 포격(바칸(関) 전쟁1863-64

조선의 개혁을 시도한 김옥균의 쿠데타(갑신 정변) 실패1884

포츠머스 강화 조약과 그 해의 베이징 조약1905

세계 대공황1929-31

중일 전쟁의 발발1937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폭 투하1945

미국에 의한 일본 점령과 제반 개혁1945-1947

일•미 안보 조약 개정을 둘러싼 소란1960

닉슨 방중1972

플라자 합의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