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이 제 기억 속에 각인된 것은 오래전 잡지에 실린 영화 드레스 투 킬에 관한 평론을 접하고 나서부터입니다. 그분처럼 라마즈 호흡법을 이수하진 못했지만 제게도 사랑하는 딸이 있고 한때 그랜드 비디오를 즐겨 찾았으며 월드컵을 무서워하고 톰 웨이츠의 노래를 좋아한다는 점은 비슷하군요. 그분의 이름은 박, 찬, 욱 님입니다.
뭔가에 홀린 듯 몇 년간 영화에 몰입할 수 있었고, 자극적이고 기이한 것에 대한 취향을 갖게 되었다면 그것 역시 제게 복음서와도 같던 감독님의 책 때문입니다. 영화를 너무 많이 안 사나이가 지은 영화보기의 은밀한 매력: 비디오 드롬(1994년최근 박찬욱의 오마주로 재출간)은 저로 하여금 불면의 밤을 지새우게 한 천일야화입니다.
영화 제목과, 그를 압축적 이미지로 표현하기 위해 다른 영화들의 제목을 빌려서 만든 부제, 예를 들어 양들의 침묵은 트뤼포의 부드러운 피부에서, 한나와 그 자매들은 모리타 요시미쓰의 가족 게임으로부터 가져오는 놀라운 상상력. 그 책을 통해 미처 경험하지 못한 B 무비들을 구해다가 테이프가 마르고 닳도록 본 경험도 이젠 그리운 추억입니다.
1994년 늦가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좌석버스를 타면 맨 뒷자리에 앉는 습성을 지닌 저는 역시 뒷자리 구석에 고개를 숙인 채 앉아 계시던 감독님과 조우하게 됩니다. 선생님의 글을 재미있게 잘 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기억하는 첫 인사말이었습니다.
종종 영화광에게서 느껴지는 허무주의자의 기운과, 동시에 지금보다 훨씬 날렵해 보이던 모습. 감독님은 무명의 당신을 어떻게 아느냐면서 신기하다는 듯 저를 보았습니다. 하긴 그때는 감독님이 데뷔작인 달은해가 꾸는 꿈만 내놓았을 뿐이니까요. 하지만 당신의 글에 매료된 젊은이의 진심이 통한 것일까요. 순간 입가에 미소와 함께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특유의 나른한 어조로 비디오 잡지사에 원고료를 받으러 가는 길이라면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헤어졌습니다.
그렇게 막연한 존경심에서 감독님을 내 마음속의 별로 간직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우연히 찾아왔습니다. 몇 년 전 술자리를 마치고 충무로 뒷골목을 정처 없이 걷다가 소나기를 피하려 뛰어든 명보극장에서 본 복수는 나의 것.
적당한 취기와 비에 젖은 육체가 어둠 속에서 안식처를 찾고 있었고, 그저 제목에 이끌려 선택한 영화에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은 저는 그로부터 상영이 끝날 때까지 무방비 상태였습니다. 영화 속에서 전기 충격을 받은 배두나처럼 내 인생 최고 걸작을 온몸으로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네스 호의 검은 물처럼 강렬하고 불길한 기운과 부조리한 유머는 생활에 쫓겨 한동안 잊고 지낸 영화 보기의 열정을 다시금 일깨워 줬습니다.
그러다가 지난해 또 우연한 자리에서 감독님을 두 번째로 만나게 됩니다. 어찌나 반가웠던지 잠깐 인사만 드린다는 것이 30분이나 그 자리에 눌러앉아 버렸으니 돌이켜보면 여간 무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처음 뵈었을 때와는 달리 감독님은 삶을 치열하게 획득한 이에게서 느낄 수 있는 현자의 부드러움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학창 시절부터 감독님의 일상을 지켜본 영화평론가 김영진 님의 신간에 그는 부드럽게 자신을 방임하는 듯 굴지만 알고 보면 예술적 체험으로 단련시키는 일에 중독돼 있었다고 썼습니다. 실제로 감독님과 음악 이야기를 나눌 때면 비올라 다 감바로 녹음한 고()음악에서 독일의 음반사 ECM의 현대음악까지 종횡무진 넘나드는 영혼의 자유를 감지합니다.
책 이야기를 할 때면 스트린드베리의 소개되지 않은 희곡들과, 좋은 번역의 감정교육을 갈구하는 탐서주의자의 욕망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시네필의 모습을 넘어서 전방위적 문화와 예술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르네상스인의 재현()입니다.
그런가 하면 당신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잔인한 표현 방식은 조작된 연출이기에 얼마든지 괜찮지만, 정작 링처럼 무서운 영화는 극장에서 볼 엄두가 안 나 집에서 DVD를 구해 보신다는 감독님의 에피소드를 통해 한없이 복합적이고도 모순적인 인간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짧은 추천사를 부탁드리기 위해 히치콕 번역 초고를 보내드렸을 때 촬영 준비로 한창 바쁜 시간인데도 1376쪽이나 되는 원고를 끝까지 읽고 수정 사항을 정리해 주신 친절한 감독님.
그 고마운 마음에 화답하고자 감독님께서 가장 좋아하는 아티스트라고 어느 인터뷰에서 밝히신 톰 웨이츠의 LP 7장을 어렵게 구해서 모임에 들고 나간 적이 있습니다. 참석한 분들과의 대화에 가려 알코올 기운 가득한 방랑자의 걸걸한 목소리를 제대로 감상하진 못하셨지만 언제라도 들으실 수 있도록 그 자리에 두고 나왔으니 한번 찾아 주시지요.
감독님께서 즐겨 쓰시던 표현대로 그냥, 뜩! 부탁드리자면 현대예술의 거장 시리즈는 먼 훗날 감독님께서 마지막을 장식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 시리즈 탄생 자체가 내 마음속의 별을 향한 저만의 오마주란 걸 아신다면.
정 상 준 을유문화사 상무이사
어이쿠, 죄송합니다. 해외에 나갔다 막 들어오는 길이라. 그런데 제가 내 마음속의 별이 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허허.
한 통의 전화는 내 마음속의 빛이었다. 18일 오후 가까스로 연락이 닿은 박찬욱(44) 영화감독. 을유문화사 정상준 상무의 원고를 받은 지 벌써 열흘쯤. 박 감독의 목소리는 까맣게 타들어 가던 속내에 빨간약이 됐다.
정 상무는 처음에 우연히 봤습니다. 각자 다른 이들과 술 먹으러 왔다가 만났죠. 처음인데도 어찌나 얘기가 잘 통하던지. 좌석버스요? 사실 기억이 안 납니다. 그 얘기도 그 자리에서 처음 들었어요.
박 감독의 첫 기억은 2년 전 책 히치콕의 추천사를 썼을 때다. 일면식도 없는데 부탁이 들어왔다. 마침 을유문화사의 현대예술의 거장 시리즈는 감독도 탐독하던 책. 추천사 제안이 영광스러웠고 뿌듯했다.
추천사만 쓰면 될 일을 박 감독은 크게 벌였다. 박 감독은 스스로도 글에 병적인 집착이 있다고 말할 정도. 보내온 원고의 오역은 물론 맞춤법까지 꼼꼼히 지적했다. 정 상무로선 성가실 만도 하련만. 이후 첫 대면에서 그런 내색은커녕 너무 친절했다.
을유가 전통의 가문이잖아요. 그런데 명망가(정 상무는 은석 정진숙 회장의 손자)의 후손답지 않게 겸손했어요. 그리고 후손답게 교양이 풍부하고 자부심이 넘쳤죠.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박 감독은 오히려 을유가 내 마음속의 별이라고 말했다. 어린 시절 을유의 세계문학전집은 감독의 정신을 형성한 책. 지금도 소중히 갖고 있다. 이런 정 상무와의 인연과 책에 대한 애정으로 출판사 기획자문위원까지 맡게 됐다.
근황요? 새 작품 각본이 거의 마무리 단계입니다. 제목이 박쥐로 알려졌는데 공포영화 느낌이 세서 바꾸려고요. 흡혈귀를 소재로 했어도 사랑에 관한 영화거든요. 관심 가져 주셔서 고맙습니다. 언제 한번 꼭 뵙죠.
친절한 감독님, 그렇게 기자의 마음속에도 별이 됐다.
정양환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