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혁명=23일 기자가 찾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정치사박물관에 보존된 블라디미르 레닌의 집무실. 그의 집무실 건물은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정부() 발렌티나 크셰신스카야가 쓰던 저택으로 볼셰비키가 1917년 초에 빼앗아 10월 혁명을 준비하던 곳이다.
관람객들은 과거 공산당 간부들의 성지였던 집무실과 베란다 옆을 무심코 지나갔다.
단체 관람을 왔다는 러시아 대학생들은 사회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황제 애인의 집을 뺏은 이유를 모르겠다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이들은 레닌이 쓰던 사무집기엔 눈길도 주지 않았다.
한 대학생은 교내에는 레닌을 박물관에서만 만나고 싶다는 의견이 널리 퍼져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도 모스크바 크렘린 광장에 안치돼 있는 레닌의 묘소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여론에 대해 레닌을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국민 여망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레닌의 뒤를 이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초상화는 박물관 쇠창살에 가려져 있었다. 창살 일부는 이미 뜯겨 나갔다. 혁명 세력의 일원이자 대학살 주역에 대한 저주와 증오가 끝나지 않은 흔적이었다.
60세가 넘은 박물관 안내인은 스탈린에게 탄압을 받았던 시민들이 이따금 몰려와 초상화를 찢으려고 해 이런 일이 벌어졌다며 사회주의 원죄는 쉽게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귀띔했다.
1917년 10월 25일(구력) 오후 9시 40분 페트로그라드 네바 강변에서 혁명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순양함 오로라 호. 이 배 주변은 요즘 자본주의 관광 명소로 변해 있다.
가이드로 보이는 러시아인은 기념품 좌판 앞에서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에게 소매치기에 주의하라고 소리쳤다. 지갑을 양복 상의 안주머니에 챙기던 한 관광객은 혁명 기념일을 쓰라린 추억으로 기억하지 않고 이런 식으로 지내는 것도 즐거운 일이라고 말했다.
그해 2월 니콜라이 2세가 폐위된 뒤 임시정부 내각이 사용하던 겨울궁전도 역사적 사건을 냉대하고 있었다. 이 궁전은 혁명군이 1917년 10월 26일 오전 2시 10분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임시정부 수상을 체포하기 위해 포위 작전을 벌인 곳.
혁명군이 침입한 궁전 안 황실 식당은 혁명 기념일을 앞두고 수리에 들어갔다. 식당과 이어진 어두운 통로에서 만난 겨울궁전 안내인들은 2시 10분에 멈춘 식당 시계도 이제는 걸려 있지 않고 찾아오는 사람도 별로 없다고 말했다.
혁명의 유산과 독소=러시아 시민들은 세계 최초로 성공한 사회주의 혁명을 외면하는 이유로 혁명 구호에 담긴 독소와 혁명 세력이 후대에 남긴 후유증을 꼽았다.
혁명 세력은 빵, 토지, 평화를 앞세우며 노동자 농민을 혁명 주력군으로 이용했다. 그러나 혁명 구호는 혁명 동조 세력을 끌어 모으는 주술에 불과했고 결국 어느 것도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이 시민들의 생각이다.
볼셰비키들이 사용했던 혁명정부 청사(현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청) 앞에서 만난 사람들은 10월 혁명이 내세운 빵과 토지의 평등은 만인의 빈곤을 초래했다. 사회주의 말년의 소련은 지하자원을 팔아 식량을 구하느라 국력을 다 쓰는 바람에 껍데기가 됐다고 비판했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는 구호가 적혀 있던 청사 입구를 지나가던 니나 프롤로바(52여) 씨는 공산당 1당 독재가 낳은 공포와 폭력 정치는 민주주의의 진전을 결정적으로 가로막았다고 말했다.
자본주의 도입 이후 명맥을 유지하는 러시아공산당은 최근 사유제도를 청산한 10월 혁명이 산업화, 집단농장, 문화혁명을 꽃피웠다고 선전했다. 이런 공산당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이제 소수에 불과하다. 올해 러시아공산당에 대한 지지율은 10% 미만으로 떨어졌다.
정위용 viyonz@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