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역사의 톱니바퀴가 크게 움직였다. 바로 중국의 신해혁명이다. 2 천년 이상 이어온 왕조 정권을 무너뜨리고,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공화제 국가가 탄생하였다. 대부분의 지도자가 일본에서 공부를 했고, 일본으로부터 지원을 받는 등, 실은 일본과 관련이 깊은 혁명이었다. 한편, 일본의 육군 내부에서는 혁명의 혼란을 틈타 이 때부터 중국 동북부(구 만주)를 시야에 넣은 움직임이 시작된다.
신해혁명 ()
1900년에 일어난 의화단 사건 후, 한족 지식층은 무력 혁명을 통해, 만주족이 세운 청 왕조를 타도하는 것이, 국가를 구제하는 길이라는 생각을 강하게 가졌다. 이러한 혁명 단체가 1905년 8월, 도쿄에서 중국 동맹회를 발족하고, 여러 차례 중국 각지에서 군사 행동을 시도했다. 1911년 10월 10일, 중국 동맹회의 영향 하에 있는 무창()의 군대 일부가 봉기하였다. 이것이 양쯔강() 이남의 각지로 순식간에 확대되어, 혁명파는 난징()에 임시 정부를 수립했다. 1912년 1월 1일, 쑨 원()을 임시 대총통으로 추대한 혁명 정부가 성립하였으며, 국호를 중화 민국이라고 정했다. 한편, 청조 측은 은퇴한 위안 스카이()를 기용하여 혁명군을 진압하려 했다. 그러나 위안 스카이()는 영국의 조정에 의한 평화를 획책하여, 2월 12일 청 왕조의 선통제()를 퇴위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3월 10일 위안 스카이()는 쑨 원() 대신 임시 대총통에 취임했다. 1911년은 음력으로 신해()년에 해당되기에 이렇게 불린다.
베이징()은 한 밤중부터 비가 내렸다.
전후 세대 첫 일본 수상이 갑자기 퇴진을 표명한 날 밤이다. 나는 천안문 가까이에 있는 호텔에 묵었다. 중국 중앙 TV에서, 일본의 후계 수상 후보에 대해 관심 있게 보도하는 것을 호텔 방에서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러면, 앞으로 중국과 일본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방송 마지막 무렵 사회자가 해설자에게 질문을 했다. 그러자, 한 학자가 이렇게 대답했다.
경제의 상호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기 때문에 기본적인 관계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단, 지금 일본인들은 대두하고 있는 중국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심리적인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만.
심리적인 문제. 이는 중국이라는 나라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떠한 관계를 구축할 것인가라는 물음과 직결된다.
약 100년 전, 신해혁명 당시, 일본도 지금과는 다른 문맥이지만, 같은 물음을 안고 있었다. 그 당시의 일본인들은 어떠한 답을 찾아내려 했는가. 혁명과 관계가 깊은 일본인 2명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아시아가 구미 열강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중국이 강국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미야자키 도텐()은 일생을 그렇게 굳게 믿고 혁명가 쑨 원()을 지지했다. 도텐()에게 있어 중국 대륙에서의 이권이라든지, 일본의 팽창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쑨 원()을 지지한 일본인들 중에는 중국에서의 이권을 고집하여 이후 우익으로 불리는 국가주의자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도텐()은 달랐다.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
도텐()에 대해 중국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난징()시에 있는 난징 중국 근대사 유적지 박물관에 가면 잘 알 수 있다. 신해혁명 후, 쑨 원()의 임시 대총통부로 사용된 건물에, 그의 집무실과 거실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쑨 원() 기념관이라고 해도 될 정도다. 연간 200만 명을 넘는 관광객들이 대형 버스로 줄지어 온다.
박물관 안뜰에는 네 개의 작은 동상이 높이 1미터 정도의 대좌 위에 각기 놓여 있다. 그 중 하나가 쑨 원()과 함께 걷고 있는 미야자키 도텐() 의 동상이다. 쑨 원()을 중간으로 반대편에는 쑨 원()의 군사 고문이 된 미국인 호머 리가 서 있다. 동상에는 중국어로 적성 우의()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거짓 없는 우정이라는 뜻이다.
안내해 준 류 샤오닝(暁) 부관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쑨 쭝샨()=쑨 원()의 중국 호칭)에게 있어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사건들을 네 개의 동상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동상들은 일생동안 쑨 쭝샨()의 혁명을 지지해 준 친구들입니다. 일본인 우인도 많이 있었습니다만, 혁명 초기에 제일 지지해 준 이가 미야자키 도텐() 씨입니다.
분명, 도텐()이 없었더라면, 쑨 원의 혁명 운동은 훨씬 어려움을 겪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지금부터 110년 전, 청나라 정부에 쫓기던 쑨 원()은 몰래 일본으로 들어갔다. 도텐()은 쑨 원()을 찾아, 중국을 바꿀 수 있는 인물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이누카이 쓰요시() 등 유력한 정치가를 소개하여, 쑨 원()이 일본을 거점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했다.
나아가, 도텐()은 1905년 도쿄에서의 중국 동맹회 발족을 지지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혁명 운동의 전환기가 왔다.
동맹회는 도쿄에 있던 중국의 혁명파, 여러 그룹들을 통합한 것이다. 베이징 대학()의 왕 샤오추(暁) 교수에 따르면, 신해혁명의 출발은 중국 동맹회의 발족에서부터라고 할 것이다. 동맹회의 성립으로 인해 제대로 된 리더와 강령, 조직이 만들어 졌습니다. 이를 계기로 신해혁명은 핵심을 가진 혁명이 되었습니다.
구미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전부를 쏟아붓다
도텐()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노년을 보낸 그의 집은 지금도 도쿄 니시 이케부쿠로()에 있다. 뜰에는 도텐()이 심은 소나무가 몇 그루 우뚝 서서 주위의 집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정말 호쾌한 사람이었지요. 가족을 돌보지 않았다고 말하면 안 되겠지만, 예를 들어, 수입이 있어도 전부 혁명에 써 버렸습니다. 그래서 생활이 어려웠지요.손자인 미야자키 후키(蕗苳) 씨(82세)가, 도텐()의 아내였던 쓰지코()와 아들인 류스케()(후키(蕗苳) 씨의 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구제일고(旧 현 도쿄대학에 해당)에 다니던 류스케()는 그 당시 고교생들의 상징이었던 망토도 사 주지를 않아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새로운 망토를 받게 되었다. 웬일일까라고 생각했는데, 다름이 아닌 폭탄을 숨겨서 옮기기 위한 것이었다.
쑨 원()이 도텐()의 집에 거처하였을 때, 혁명파를 노리는 중국인이 찾아 왔다. 쓰지코()가 눈치를 채고 뒷문으로 쑨 원()을 도망시키고는 고교생인 류스케()를 동행케 하였다. 가까운 신사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으려니, 밤하늘에 핼리혜성이 떠올랐다. 쑨 원()은 류스케()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혁명이 성공할 조짐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이런 생각이 든다. 도텐()은 왜 한결같이 중국의 혁명을 지원했을까. 신해혁명을 오래 연구해 온 야마나시 현립대(県)의 구보타 분지() 국제 정책학 부장의 설명이다.
도텐()은 자유 민권 신자로, 사회적 평등을 이상으로 삼았다. 국내에서 사회 개혁을 진행시키기 위해서라도 중국의 혁명과 근대화를 달성시켜, 구미의 침략을 막으려 했습니다. 중국의 혁명으로 일본의 독립 유지와 일본과 세계의 개혁을 촉진하려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혁명군 참가한 대위, 높은 인물의 밀명으로
또 한 사람의 일본인 이야기이다.
니가타현(県) 노다무라() (현재의 가시와자키시()의 일부) 출신으로, 신해혁명 발생 직후에 혁명군에 참가하여 사망한 가네코 신타로(郎)이다.
가네코()는 청나라 정부가 불러서, 군사 학교의 교관을 맡은 적도 있는 중국 통의 보병 대위로서, 러일 전쟁 후에는 예비역으로 노다무라()의 촌장을 하고 있었다. 임기가 끝난 직후, 우창(현재의 우한시() 우창지구(区))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얼마 후, 가네코()는 가족에게 아무 말도 없이 마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고향 가시와자키시()의 향토사를 연구하는 기네부치 다케지(渕) 씨는 33년 전에 가네코 신타로(郎)에 대해서, 남아 있는 편지들과 당시의 현지 보도 등을 면밀히 조사하여 논문으로 정리했다. 중국에서 보내 온 아내 앞으로 된 편지에 네 개의 가명을 사용한 것과, 성공하면 재회의 기회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숨어 일을 돕다가 죽었다고 생각해 달라.고 전하고 있다.
기네부치(渕) 씨는 봉기를 안 가네코()가 중국행을 희망하여 육군의 밀령을 띠고 혁명군에 참가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기네부치(渕)로부터 가네코 신타로(郎)의 친족이 있다는 것을 듣고, 니가타현(県) 나가오카시()로 향했다. 손자인 오미야 가즈마사() 씨는, 가네코()가 남긴 낡은 사진첩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쑨 원()의 혁명에 참가했다고 들었다. 군의 정식 명령은 아니었지만, 높은 사람에게 이야기를 듣고 갔다고 했다.
그 높은 사람은 누구였고 무슨 목적으로 파견했을까. 핵심은 알 수 없는 채로, 가네코()의 이름은 역사의 어둠 속에 덮여 있다.
독립 국가를 만들라고 훈시한 사적인 파병
내가 그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글을 보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올 4월에 간행된 우쓰노미야 다로(郎)의 일기를 읽고 있었을 때였다. 우쓰노미야 ()는 신해혁명 당시, 육군 소장으로 참모 본부에서 정보를 담당하는 제2 부장이었다.
11월4일 토요일 고야마 슈사쿠()를 본부로 불러 청나라에 열심인 후비() 보병 대위 가네코 신타로(郎)에 대해서 물었다. 이 사람을 청의 반란군에 보낼 것을 결심하고(개인적 용무로), 내일 아침 본인이 찾아 와 줄 것을 의뢰했다.
11월5일 일요일 이른 아침, 가네코 신타로(郎)가 왔다. 그에게 내 사적인 의견의 요지를 전하였다. 남북의 강화를 막고, 남방에 일국이라도, 여러 나라를 세울 필요성을 전하고, 준비한 일금2천 엔을 주어 청으로 건너가도록 하였다. 그대는 일단 우창의 혁명군에 참가할 생각으로 출발하라.
즉, 가네코 신타로(郎)의 인물을 확인한 뒤, 자신의사업의 일환으로 혁명군에 참가시킬 것을 결의했다. 가네코()에게는, 청나라 정부 측과 혁명군 측의 강화를 방해하고, 혁명군 세력권인 중국 남부에 독립 국가를 만들도록 훈시하여, 그에게 파견 비용을 건네 준 것이었다. 정부와 육군 수뇌부가 전혀 모르는, 우쓰노미야()의사적인 파병이었다.
가네코()에게 말한사적인 의견이란 무엇일까.
우창()에서 혁명이 일어난지 5일째 되던 날 밤, 일단 잠자리에 든 우쓰노미야()는 새벽에 일어나, 평소부터 생각하고 있던 대 중국 정책을 단번에 다 써내려 갔다. 참모 본부 안을 자신의 방침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정책의 포인트는 중국 전체를 한꺼번에 획득할 수는 없으므로, 몇 개의 독립국으로 나누어 영토를 보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번 내란으로 인해, 만주족과 한족 2개의 국가로 나누어질 가능성이 있다 표면적으로는 청나라 조정을 돕고, 뒤에서는 혁명군을 지원한다. 시기를 보아 2개의 국가로 나누어지도록 조정한다 그 후, 보호국, 동맹국 등의 특수한 관계를 맺는다라는 내용이다.
이 배경에는 러일 전쟁으로 획득한 다롄(), 뤼순()의 조차지, 남만주(満) 철도의 이권을 영구히 유지하려 한, 이른바 만주와 몽고 문제가 있었다.
가네코()는 제일보병 고문관으로서 혁명군 부대를 지도했지만, 하이난()에서의 전쟁은 청조 정부군의 반격으로 가장 격렬한 공방전이 되었다. 혁명군은 패퇴하고 약 1만 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그 중의 한 명이 47세의 가네코()였다. 우쓰노미야()는 1913년 2월, 가네코()가 사망한 한양() (현재 우한시() 한양()지구)을 방문해, 가네코()의 무덤을 세울 장소를 선택하고 브랜디를 따랐다. 나는 한양()을 여기저기 둘러보며, 그 장소를 찾아보았지만 끝내 찾지를 못했다.
우쓰노미야()의 대 중국 정책은 결국, 정부의 생각에는 반영되지 않았다. 당시의 정부는 대영미(対) 협조 외교를 기축으로 하고 있어, 모험적인 정책은 채택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쓰노미야()도 불만이 있었지만, 정부의 결정에 따랐다.
하지만, 혁명의 동란기부터 육군은 대륙으로 정보 수집을 위한 무관들을 많이 파견하여, 독자적인 중국 대륙 정책을 만들려 하였다. 그리고 만주를 독립국으로 하여, 만주와 몽고 문제를 단번에 결착시키려 하는 아이디어도 재 속의 숯불과 같이 숨겨두고 있었던 것이다.
(사토 가즈오 )
쑨 원 () (1866~1925)
중국의 혁명가이자 정치가다. 중국 국민당을 창설했다. 민족민권민생의 삼민주의를 주창하였고 혁명을 이끄는 사상으로 삼았다. 현재도 중국에서의 평가는 상당히 높다. 2006년에 있었던 쑨 원() 탄생 140년 대회에서는 후진타오() 국가 주석이 걸출한 애국주의자이며 민족의 영웅, 중국 민주 혁명의 위대한 선구자라고 그를 기렸다.
13세 때, 객지에서 돈 벌이로 성공한 맏형이 있는 하와이로 갔다가 18세에 귀국한다. 의학을 배운 후, 1894년 하와이에서 혁명 비밀 결사 흥중회(会)를 조직하고, 다음 해 최초의 무장 봉기를 기획했지만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했다. 중앙대()의 리데이코() 교수에 의하면 쑨 원()은 일본을 14회 방문하여 통산 10년 가깝게 일본에서 체재했다고 한다.
미야자키 도텐() (1871~1922)
구마모토현(県) 출신. 자유 민권 사상에 강한 영향을 받아 형인 야조(弥蔵)와 함께 중국 혁명을 지원하기에 분주했다. 1902년 신문에 연재한 33년의 꿈에서 쑨 원()을 소개하여, 일본과 중국에 있는 혁명파를 연결했다. 일생동안 관직에 오르지 않고 재야에 있었지만, 신문과 잡지에 많은 기고를 하였다. 그는 뒷날 의리와 인정을 노래하는 료교쿠사()가 되었으나, 손자인 후키(蕗苳) 씨는 료교쿠사()는 서툴렀던 것 같습니다라고 말한다. 젊은 마오쩌둥(沢)이 도텐()에게 강연을 의뢰한 적도 있다. 모친으로부터 다다미 위에서 죽는 것은 남자로서 최상의 치욕이다라는 가르침을 받고 큰 그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냈다.
우쓰노미야 다로(郎) (1861~1922)
사가번() 출신이다. 육군 사관 학교와 육군 대학교를 졸업한 육군 엘리트로, 주로 참모 본부에서 정보 분야를 담당했다. 육군 내에서는 반조슈파()의 중심인물이었다. 신해혁명에서는 이와사키 히사야(弥)(미쓰비시 재벌 소유주)로부터 활동비 10만 엔(오늘 날의 수억 엔에 상당)의 약속을 받아내어, 중국에서의 정보, 공작비에 충당했다. 후일 수상이 되는 이누카이 쓰요시()와도 관계를 맺어, 중국으로 향하는 이누카이()에게 1만 엔을 건네주었다. 1919년 3•1 독립 운동 때에는 조선 군 사령관이었다.
우쓰노미야()의 장남은 군축 문제와 중국과 한반도와의 우호를 위해 힘쓴 고 우쓰노미야 도쿠마(徳) 참의원이다.
신해혁명은 동아시아의 중학생 교과서에서 어떻게 평가 되고 있는가. 3•1 독립 운동과 5•4 운동은 각각 어떻게 가르치고 있을까.
일본 - 인물에 관한 칼럼에서 자세히 다루다
신해혁명에 대해 일본 교과서에서는, 러일 전쟁 후 중국과 조선에서 일어난 중대한 변화의 하나라고 기술한다. 도쿄 서적의 새로운 사회 역사에서는 약 1페이지 정도 기술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제국주의 열강의 압박에 대항하려는 움직임이 강해져, 청을 무너뜨리고 민족의 독립과 근대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중심인물이 삼민주의를 주창한 쑨 원()입니다라고 서론을 시작한 후,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이 건국되었지만, 위안 스카이()의 독재 정치를 거치며, 군벌이 할거하게 된 개요를 설명하고 있다.
3•1 독립 운동과 5•4 운동에 대해서는 인도의 민족 운동과 함께 아시아의 민족 운동이라는 테마에서, 2페이지에 걸쳐 정리하고 있다. 학습 지도 요령에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민족 운동 고조를 이해한다고 되어 있으며, 거기에 맞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본이 중국에게 억지로 승인하게 한 21개 조의 요구에 대해서는 그 요점을 뽑아 따로 게재하고 있다.
중국과 조선의 사건에 관해, 이 교과서에서 역점을 둔 내용은 일본과의 관련이 있는 인물 소개 칼럼이다. 신해혁명에서는 쑨 원()과 일본 이라는 제목으로 쑨 원()이 일본과 깊은 관계가 있었으나, 점차 일본의 대 중국 정책을 비판하게 된 것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3•1 독립 운동에 대해서는 조선 백자의 아름다움을 평가한 민예 운동가 야나기 무네요시(悦)를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한다.
우리 일본인이 현재 조선인의 입장에 있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 일이 아니라고, 그것을 단순한 폭동이라 치부하며 경멸하는 것뿐이다. 반항하는 그들보다 훨씬 더 어리석은 것은 압박하는 우리들이다.
도쿄 서적의 교과서에 야나기() 씨가 등장한 것은 10년 전의 일이다. 와타나베 노리오 (辺) 사회 편집부장은 역사를 다면적으로 학습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 이라고 말한다.
(요시자와 다쓰히코 沢)
중국 - 부르조아 지도의 민주 혁명
중국에서 반수 이상의 학교가 사용한다는 인민 교육 출판사의 중국 역사 에서는 신해혁명을 근대화의 모색 이라는 단원에서 4페이지에 걸쳐 다루고 있다. 현 중국 정부가 쑨 원()을 높이 평가하는 것을 반영하여, 쑨 원()과 관계되는 기술이 많다. 도쿄에서 중국 동맹회를 발족한 것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쑨 쭝샨()은 혁명 세력을 단결하여, 통일된 혁명 조직인 중국 동맹회를 설립하자고 제창했다.(중략)그 해 8월, 중국 동맹회 성립 대회가 일본 도쿄에서 개최되었다. (중략)동맹회 성립은 전국의 부르조아 민주 혁명 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학습 지도 요령에 해당하는 역사 과정 표준 에서는 쑨 쭝샨()의 주요한 혁명 활동을 이해하고, 우창 봉기를 알며, 신해혁명의 역사적 의의를 탐구한다라는 지침을 내리고 있다.
5•4 운동에 대해서는 신 민주주의 혁명의 흥기 라는 단원으로 1과 3분의 2 페이지가 할당되었다. 5•4 애국 운동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파리 강화 회의에서 중국의 요구가 거절당해, 운동이 시작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요구 거절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쌓이고 쌓인 중국 인민의 분노가, 화산과 같이 폭발했던 것이다!
역사 과정 표준에서는 부르조아 계급이 지도하는 구 민주주의 혁명의 종결을 고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지도하는 신 민주주의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라며 혁명 운동의 전환점으로 평가하고 있다. 교과서에서도 처음으로 제국주의와 봉건주의에 철저히 반대한 애국 운동이었으며, 중국의 신 민주주의 혁명의 시작이었다 고 기술한다. 바로 다음 항에서는 중국 공산당의 탄생 을 다루고 있다.
한편, 3•1 독립 운동에 대해서는 중국사에서도 세계사에서도 일체 언급하지 않고 있다.
(사토 가즈오 )
한국 - 세계의 민족 운동과 비교
신해혁명에 대해서는 세계사를 취급하는 사회 2 (도서출판 디딤돌)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혁명 세력은 청의 타도를 선언하며 무장 봉기하였다. 봉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황제가 퇴위하고 쑨 원(())이 임시 대총통으로 추대되어 중국 최초의 공화국이 탄생하였다
집필을 담당한 태릉 고등학교의 김육훈 교사는 아시아 최대 나라에서 군주제가 무너지고, 국민 국가를 세우는 운동이 일어났다. 식민지였던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독립 후에는 공화제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라며, 신해혁명의 영향을 지적했다.
사회 2에서는 인도, 베트남, 이집트 등 대국의 지배에 저항한 민족 운동에 관한 기술이 10페이지에 달한다. 3•1 독립 운동에 대해서는 제1차 대전 후, 제창된 민족자결주의가 계기가 되었다.라고 기술하였고, 중국의 5•4 운동과 나란히 설명하고 있다. 김 교사는 자국의 민족 운동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세계 각지의 운동과 비교하는 안목을 키우고 싶다.라고 말한다.
한편, 자국사에서는 3•1 운동과 그 영향에 대한 기술만으로 9페이지를 할애했다.
그때까지 끈질기게 계속되어 온 한민족의 독립 운동을 하나로 정리하고 온 민족이 하나가 되어 전개된 최대 규모의 독립 운동이었다.
운동은 국내외에 임시 정부를 만드려는 움직임으로 이어진다. 3•1 운동은 우리 민족의 목표가 완전한 자주 독립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고, 이를 계기로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은 국내외에서 더욱 다양하게 전개될 수 있었으며, 그 결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현재 한국 헌법의 전문에는 국민이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라고 명기되어 있다. 국사 편찬 위원회의 허영란 박사는 한국의 법적 정통성은 3•1 운동에 있으며, 교과서에서도 자세하게 가르친다.라고 말한다. 교과서에서는 중국과 인도의 민족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도 강조하고 있다.
(사쿠라이 이즈미 桜)
대만 - 국부라는 경칭이 사라진 쑨 원()
신해혁명과 중화민국 건국에 대해서는 중국사에서 상당히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국민 중학•사회 (남일서국())에서는 우창()봉기에 대해 1페이지 정도를, 위안 스카이()의 제정() 운동까지의 민국 초기에 관해 2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민국 초기의 소란이라는 단원에서는 이 시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신해해명 후, 아시아 최초의 민주공화국인 중화 민국을 수립하였지만, 국운은 순조롭지를 못했다. 위안 스카이()가 공화제를 무너뜨리고, 군벌이 난립하여, 남북 분열의 사태에 이르렀다. 그리고 나라 밖으로도 계속되는 우환으로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한편, 1983년의 역사 과정 표준에 근거한 교과서에서는 국부・쑨 쭝샨() 선생님 의 혁명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였다. 국민 혁명 운동의 위대한 창도자로 추앙되었으며, 후의 국민당 지도자인 장제스()와 함께, 선생님 이라는 경칭으로 불리었다.
현행 교과서에서의 쑨 원()은 혁명 지도자 중의 한 명이라는 평가이다. 사진 설명에는 국부 쑨 쭝샨() 선생님 이란 표현이 남아 있는 것도 있지만, 2003년의 초중학교 9년 일관 과정 요강에 따르면, 본문에서는국부등의 경칭이 사라졌다. 현 민진당 정권이 추진하는 역사 교육의 대만화, 탈 중국화의 흐름이다.
남일서국()의 교과서 편집 지도 위원인 초 호이민(恵)•정치대학 역사학부 교수는 국부 는 국민당이 만든 개념이다. 그를 위대한 인물로 만들어 내었지만, 그 후 연구에서 그다지 위대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쑨 원()이 없었더라면 중국은 더 좋은 쪽으로 발전했을지도 모른다. 라고 말한다.
5•4 운동에 대해서는 2페이지를 할애하여 높이 평가하고 있다.
5•4 애국 운동은 중국 사회 각 계층에 퍼진 자각의 표현으로, 국가의 자립과 부강을 요구하는 국민 의식이 높아졌다.
한편, 3•1 운동에 대해서는 세계사의 아시아의 민족 부흥 운동이라는 항목에 1919년, 서울에서 대규모 항일 운동이 일어났다.라고 기술했지만, 3•1 운동이라는 표현은 보이지 않는다.
(다무라 히로쓰구 )
[ 시리즈 지식인 20명에게 듣는다] 7. 동아시아 근현대사의 10대 사건은?
이중 외교의 시작 시베리아 출병 - 가토 요코() 도쿄대학 준 교수
작가인 시로야마 사부로(郎)는 (일본이) 전쟁으로부터 얻은 것은 헌법뿐이다.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다른 나라가 혁명을 통해 획득한 것들을 일본은 이웃 여러나라를 전화 속으로 몰아 넣으며 전쟁을 통해 획득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일본인의 전쟁의 특징은 무엇이었냐 에 중점을 두고 싶다. 의외로 영향이 컸던 것은 러시아 혁명과 시베리아 출병이다. 러일 전쟁 후, 중국 동북부로부터 몽골에 걸친 지역은 러시아와 일본 양국의 충돌이 일어나지 않도록 분리되어 있었다. 러시아 혁명으로 그 질서가 무너지자, 일본군은 영국과 프랑스의 의향에 힘입어 출병을 단행했다.
이 때 함께 출병한 미국은 일본군의 출병 지역을 연안부로 제한했지만, 참모 본부는 중국과 일본군을 중국군 사령관 지휘 하에 둘 수 있다는 협정을 맺어, 만주 전역에서 사실상 자유로이 행동을 취했다. 때마침, 하라 다카시()가 최초로 정당 내각을 조직하여 사용 병력과 지역을 한정하였지만, 군은 교묘히 빠져 나갈 길을 만들었다. 일본의 이중 외교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여러 가지 공작과 모략을 담당하는 육군 특무 기관이 설치되었던 것도 이 때다. 제대로 정식 수속을 밟지 않고 모략을 계기로 전쟁을 시작하여, 현지에 괴뢰 정권을 만들어서 사실상 컨트롤은 일본군이 하는 독자적인 수법도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2번째로는 태평양전쟁의 패배다. 일본 사회의 기본적 질서 원리였던 국체(国体)가 바뀌었다. 아시아에 있어서 일본의 패배는 광복이었지만 혼란도 가져 왔다. 혼란이 의외로 빠른 시기에 찾아 와, 한국의 경우는 독립 세력이 하나가 되어 건국 준비를 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으며, 분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중국에서도 국민당 정부가 공산당에 대한 태세를 취하지 못하고, 내전을 거쳐 공산당이 정권을 잡았다.
1899년과 1900년 미국의 문호 개방 선언은 늦게 찾아 온 제국인 미국의 방편이었지만, 피지배 민족에게는 힘을 주었고, 이후의 대세로 이어졌다. 지배받는 쪽의 편에 서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미국의 수법이다.
3•1 독립 운동은 일본에 있어서, 군부를 대신하여 정당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음에도 살리지를 못했다. 조선에 대한 통치를 무단 통치에서 전환할 당시, 정당은 조선 총독의 자리를 두고 싸워, 당리당략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군부의 체면이 깎였음에도 정당이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자, 군부의 영향력이 다시 부활하게 되었다.
만주 사변 전에 일본이 남 만주(満)에서 지니던 권익은, 국가가 전쟁에 의해서 획득한 조약상의 권리가 대부분이었다. 일본의 민간인들은 스스로 대륙에 진출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 국가와 군대의 보호 하에 진출하였다. 이것이 일본인의 배외주의를 조장했다. 게다가, 중일 간에는 조약에 관한 주장의 불일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에게는 알리지 않아, 만주 사변이 중일 전쟁으로 확대되는 사태에 영향을 끼쳤다.
중일 공동 성명은 미국이 중국을 설득하여 실현되었다. 당시 미국이 일본의 핵무장을 크게 염려하여, 중국과 협력해서 일본을 억제하려 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본인은 베트남 전쟁을 베트남 측을피해자라고 보면서도, 기지를 계속 제공했다. 그 당시 정말 필요했던 것은 침략자의 입장에서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재고해야하지 않았을까.
신해혁명으로부터 중화인민 공화국의 성립까지를 긴 중국 혁명의 시기로 파악한다. 도중에 국공 합작과 대일 전쟁의 승리라는 획기적인 일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을 들 수 있다. 일본이라는 마지막 참가자를 얻자, 제국주의 전쟁은 한층 더 박차를 가해, 청조와 러시아 왕조가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다.
(인터뷰: 요시자와 다쓰히코(沢))
약력
1960 년 생. 1930년대의 일본 군사, 외교사를 중심으로 연구하고 있다. 저서에는 전쟁의 논리, 전쟁의 일본 근현대사등이 있다.
내가 선택한 10 대 사건
(1) 러시아 혁명과 시베리아 출병
(2) 태평양 전쟁의 패배
(3) 미국에 의한 문호 개방 선언
(4) 3•1 독립 운동과 정당 정치의 부패
(5) 만주 사변에서 중일 전쟁으로
(6) 중일 공동 성명
(7) 베트남 전쟁
(8) 긴 중국 혁명
(9) 청일 전쟁
(10) 러일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