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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조선 전쟁과 베트남 전쟁(

Posted March. 04, 2008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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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태평양전쟁에서의 일본의 패배로 인해, 동아시아 지역은 동서 양 진영이 팽팽하게 맞서 대립하는 무대로 바뀌었다. 초강대국인 미국과 소련에 중국까지 얽혀 냉전 하에서 두 번의 전쟁이 일어났다. 제8장에서는 (상)에서 조선 전쟁(한국 전쟁)을 다루고, (하)에서는 베트남 전쟁을 다루기로 한다. 이 두 전쟁이 동아시아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져 왔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두 개의 선이, 한 마을과 주민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하나는 일본이 패전한 후인 1945년 9월, 미국과 소련이 점령 지역을 나누기 위해 그은 38 도선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한국 전쟁의 격렬한 공방전 끝에1953년 7월 에 그어진 군사 분계선이다. 처음에는 북측 땅으로, 그 다음에는 남측의 일부가 된 마을이 있다. 분단으로 인해 운명이 뒤바뀐 마을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나는 한국으로 향했다.

그 마을은 철원(鉄)이다. 조선반도(한반도)의 배꼽이라 불릴 만큼, 정 한가운데에 위치한다. 광대하고 비옥진 평야의 중심에 있어 옛 부터 교통의 요지였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하에 있던1914년, 현재의 서울과 원산을 묶는 경원선이 철원을 통과했다. 경승지인 금강산까지 가는 다른 철로의 출발지이기도 했다. 당시 철원역 앞에는 은행과 상점들이 처마를 나란히 하고 마을에는 병원과 극장도 있었으며, 상수도도 정비되어 있었다. 약 2만 여명 이 사는 내륙의 중심으로 번창했다.

활기가 넘쳤었을 그 곳을, 향토사를 조사하는 김영규() 씨(45)와 함께 찾았다. 38 도선에서 북쪽으로 약 30km. 눈이 남아있는 농지와 키 작은 나무들, 마른 풀들이 널린 들판에 백학과 두루미가 유유자적하게 노닐고 있었다. 한가로운 풍경이었지만, 곳곳에 보이는 한국군의 검문소와 지뢰라고 쓴 붉은 간판이 걸린 철조망이 군사 분계선이 가까운 것을 알려 주었다. 멀리 수키로 앞에 보이는 산들은 북조선(북한)이었다.

한 때 번성했던 역전 거리에는 벽이 검게 타고 무수하게 총구멍이 뚫린 폐허가 둥그러니 남아 있었다. 김 씨는 한국 전쟁 때, 격렬한 시가전과 폭격으로 마을은 사라졌습니다. 지금도 민간인들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없는 구역이기 때문에, 전쟁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고 설명했다.

일본 통치 하에서 태어나 조선 전쟁 때까지 역 앞 번화가에서 산 김송일() 씨(77)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일생은 두개의 선에 휘말린 사람들의 비극을 생생하게 전해 준다.

1945년 해방이 되어 일본군이 사라졌다고 생각한 것도 한 순간, 마을에는 또 소련군이 나타났다. 한반도 중심에 위치한 이 마을은 주민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대국들이 그은 경계선의 북쪽에 들어가 버려 양 진영이 눈을 부라리며 맞서는 최전선의 마을이 되었다.

이듬해에는 주민들이 동원되어 북조선의 노동당 청사가 세워졌고 마을 곳곳에 김일성의 초상화가 걸렸다. 38 도선은 북조선의 인민군이 경비를 하게 되면서 남쪽과는 자유로운 왕래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일본어를 강제로 배우게 하더니, 이번에는 공산 사상을 배워야 했지요. 우리는 단지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1950년 6월, 38 도선으로 향하는 병사와 전차 부대의 행렬이 날마다 늘어나는가 했더니, 머지않아 전쟁이 시작되었다. 다니고 있던 고등 중학교의 상급생들과 동급생들이 징병으로 끌려갔다. 김 씨는 몸을 숨겼지만, 아버지가 감금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자수했다. 인민군이 되어 전차 부대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갔다. 서울의 한강을 넘어갔지만, 미군의 반격으로 후퇴를 했다. 약 100일 만에 철원으로 돌아왔을 때, 산을 넘어 도망을 쳤다. 다음 해, 피난을 하다가 미 공군 기지에서 바텐더의 일자리를 찾았다.

어느 날 손님 중의 한 장교가 자신의 전과를 자랑했다. 폭격한 장소를 듣고는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트라이앵글. 격렬한 공방전이 계속 된 철원 평야를 당시에 철의 삼각지라 부르고 있었다. 내 직장의 부대가 내 고향을 폭격하다니. 인생은 참으로 무상하구나라고 느꼈습니다.

미국과 소련을 등에 업고 1948년, 반도에는 남과 북으로 갈린 두 개의 정권이 생겨났다. 대한민국(한국)의 이승만 대통령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북조선)의 김일성 주석도, 상대를 침공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38 도선을 사이에 두고 양 군대가 서로를 겨누고 있었고 때로는 무력 충돌도 일어났다. 어차피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고 철원에서 만난 전쟁 체험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당시의 상황을 회상했다.

북측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연행 / 농민 등 153명을 총살

같은 민족 간의 전쟁은, 미국의 맥아더가 인솔하는 국제 연합군과 중국군의 참전으로 인해 대규모 국제전이 되었다. 전선은 몇 차례나 남과 북을 오갔고, 그때마다 민중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맨 몸으로 피난을 가거나, 혹은 살기 위해서 당시의 점령자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 교외에 있는 고양시의 간선도로가의 작은 언덕을 오르면, 우물처럼 어둡고 깊은 구덩이가 입을 열고 있다. 1995년, 이곳에서 153 명의 유골이 나왔다.

조선 전쟁이 시작된 수일 후, 이 일대는 북한에 함락되었지만, 3개월 안에 다시 한국이 탈환을 했다. 부역자라는 이유로, 수많은 농민들이 우익 단체와 경찰 손에 연행되어 이 구덩이 앞에서 차례차례로 총살을 당했다. 희생자 중에는 소년 소녀들도 있었다. 유족들의 호소로 조사를 실시한 국가 독립 기관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 화해 위원회)는 작년에 경찰에 의한 불법 집단 총살 사건이었다라는 보고서를 내고 정부가 공식 사죄할 것을 권고했다.

냉전 하의 전쟁은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인해 숱한 참극을 불러왔다. 미군에 의한 학살 사건도 있었다. 시민 단체에서는 한국 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 희생자 수는 100만 명에 이른다고 추정하지만, 1990년대 전반까지 계속 된 군인 출신 대통령 시대에는 유족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진실・화해 위원회의 상임위원으로서 집단 학살 규명에 힘쓴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민중에게는 학살 그 자체가 전쟁이었다고 지적하며 이렇게 말했다.

학살에 가담한 경찰이나 우익 단체에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 하의 협력자가 많았습니다. 미소가 38 도선을 그었던 것도 일본군의 무장해제 때문이었습니다. 분단과 전쟁의 비극은 식민지 지배의 유산이기도 합니다.

내 토지를 지키겠다/중국 지원병도 전쟁터로 향했다

한국 전쟁에서는 남과 북을 지원한 20수만 명의 외국인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그 중에서도 중국인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는 18만 명에 달한다. 왜 이렇게 많은 군사들이 한반도로 갔는가.

베이징()에서 평양 행 야간열차를 타면 14시간이 걸린다. 북한 국경에 가까운 랴오닝()성의 단둥()역에서 택시로 5분 거리인 압록강까지 오면, 강 건너편에 북한이 보인다. 강 한가운데가 국경선이다. 강을 잇는 중북 우의교위를 트럭이 줄지어 달린다. 북중 무역의 약 7%가 단둥()을 경유한다고 한다. 원래, 이 다리는 중국 동북부에 만주국이 있던 일본에 의해1943년에 만들어졌다. 강 위에는 또 하나의 부러진 다리가 있었다. 한국 전쟁 때 폭격을 받아, 북측 부근의 다리가 무너져 버렸다. 이를 압록강 단교라고 부른다. 이 다리도,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합한 다음 해에 만들어졌다. 한반도를 남북으로 잇는 철도와 대륙의 철도를 연결하기 위해서 일본이 만든 것이다. 일찍이 안둥()으로 불린 변방의 마을, 단둥()은 일본군의 대륙 침략의 거점이었던 것이다.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위치한항미원조()기념관을 찾았다. 한국 전쟁을 전하는 시설이었다. 관내에는 녹슨 총과 수류탄, 진군나팔, 격추당한 미군기의 파편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김일성이 조선을 미제국의 식민지로 만들 수는 없다고 마오쩌둥()에게 지원을 요청한 편지와, 지도자(마오쩌둥())의 장남 마오안잉() 등, 한국 전쟁에서 전사한 영웅들의 흉상도 있었다.

쟈오예춘() 관장은 단둥()은 전쟁터인 조선에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마을 자체도 여러 번 폭격을 받아 희생자가 나왔다. 전쟁은 중국을 지키기 위한, 단둥()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다라고 말했다. 한국군과 국제 연합군이 38 도선을 넘어 북진한 것은 1950년 10월이었다. 중국의 인민 지원군은 압록강을 건넜고, 단둥()은 출격과 군수 보급의 거점이 되었다. 박물관이 자리한 언덕에는 사령 시설이 있었다고 한다.

참전한 노병사를 만났다. 84세의 순찐쿤() 씨는 단둥() 태생이었다. 일본의 패전으로 관동군이 떠난 후, 중국 공산당의 토지 개혁으로 소작농이었던 순 씨도 토지를 가지게 되었다.

압록강을 건너 전쟁터로 향하던 때의 마음을 묻자, 순 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내를 오랫동안 볼 수 없다는 것은 괴로웠지만, 언제 미군이 공격해 와도 이상할 게 없었다. 모처럼 가지게 된 토지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필사적으로 싸우려 했다.

전쟁터에서는 미군과 백병전을 거듭해 21명을 죽였다고 한다. 같은 부대원 120명 중 살아남은 것은 고작 5명이었다. 손 씨는 허리에 폭탄의 파편이 박히고 어깨에도 총탄을 맞았지만, 아내와 재회할 수 있었다.

1년 전에 새로운 중국이 성립한 직후의 참전이었다. 신중국의 지배 지역도 전 국토에 달하지 못했고,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황폐해진 국토를 재건하는 것도 과제였다. 무엇이 참전을 결정하게 하였는가. 냉전기의 중국 외교정책을 연구하고 있는 뉴쥔() 베이징대() 교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중국은 1950년 가을에 대만으로 출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국 전쟁으로 미군 제7 함대가 대만 해협을 봉쇄하자 긴장감이 감돌았다. 또한, 소련으로부터 김일성이 전쟁에 지게 되면 중국 동북부에 망명 정권을 받아들여 주라는 은근한 요청이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미군과 직접적으로 마주보게 된다.

대륙에서의 중미 전면 전쟁의 위험을 피하고 싶다는 생각은 미국도 같았다. 원폭 투하와 대만 국민당군의 파병을 주장한 맥아더를, 투르만 대통령은 해임했다. 그 3개월 후인 1951년 7월, 휴전 교섭이 시작되었다. 한국 전쟁으로 인해, 중국은 북한으로, 미국은 한국으로 영향력을 늘려갔다. 한반도의 운명이, 대국의 생각들을 빼 놓고는 움직일 수 없는 구조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마지막으로 다시 철원 이야기를 하도록 하자.

폐허가 된 구 시가지를 대신해, 휴전 후에는 수십km 남쪽에 철원군의 새로운 중심가가 생겼다. 정착한 사람들 중에는 북측에 고향이 있는 실향민이나 가족과 생이별한 이산가족이 적지 않다. 경원선이 개통해 90주년이 되는 2004년, 이들 주민들이 옛 철원 역에 모여, 한국 전쟁으로 분단된 철로를 복원할 것과 평화 통일을 기원했다.

최근 주민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바로 옆 군의 신탄리 역까지만 다니고 중단되어 있던 철로를 철원군 내에까지 일부 복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공사는 3월에 시작된다. 군청을 방문하자, 정호조() 군수가 꿈을 말해 주었다. 철원은 남북이 접하는 마을입니다.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여기가 새로운 행정 수도가 될 가능성도 있지요. 그것이 언제가 될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만.

나카노 아키라()

전후 일본의 방향을 바꾸었다.

조선 전쟁은 일본에 무엇을 가져왔는가.

조선전쟁 특수는 일본의 전후 부흥에 기폭제가 되었다. 경찰 예비대(자위대)가 창설되고,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과 일미 안전 보장 조약이 맺어졌다. 전쟁 중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일본을 공산권의 방파제로 평가하는 미국의 전략을 반영한 것이었다.

방파제의 중요한 거점이 된 것은 오키나와였다. 가데나() 기지에는 조선 전쟁으로 원폭이 설치되고 테스트를 위해, 모의 원폭을 비롯한 거대한 폭탄을 투하하는 폭격기가 북조선(북한)을 향해서 몇 번이나 날아갔다고 하는 미국인 연구자의 지적도 있다.

당시, 기지에 가까운 온나() 마을에 살고 있던 오시로 야스히데() 씨(67)는 매일 저녁, 동중국해를 넘어 북쪽에서 돌아오는 프로펠러 폭격기를 보았다. 휴전 교섭이 진행되던 1953년 4월, 미군은 토지 수용령을 내리고, 저항하는 민중을 내쫓고는 불도저로 집과 논밭을 부수어, 새로운 기지를 늘려 갔다.

히야네 데루오() 류큐대() 명예 교수는 조선 전쟁을 통해 미국은 오키나와를 군사 거점의 요지로 중요성을 새삼 인식했다고 지적한다. 훗날 베트남 전쟁 때, 오키나와는 최대 규모의 폭격 거점이 되었다.

:조선 전쟁(한국 전쟁):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해, 1953년 7월 23일에 휴전 협정이 맺어졌다. 지금도 휴전상태이다.

한국에서는 개전 날짜인6•25 전쟁이라고도 하고 한국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북한에서는조국 해방 전쟁이라 부른다. 참전한 중국은 미국의 침략에 저항하고, 조선을 지원했다는 뜻으로 항미원조() 전쟁이라 부른다.

1948년에 출범한 한국과 북한은 모두 한반도의 전 국토를 영토로 하며, 서로를 비합법이라 주장하고 있다. 당초, 한국 전쟁은 정권의 정통성을 둘러싼 내전의 성격이 강했지만, 미군이 이끄는 국제 연합군과 중국군의 참전에 의해 국제 전쟁으로 양상이 바뀌었다. 소련도 공군 조종사를 북측에 가담시켰다. 일본도 미국 측의 요청으로 비밀리에 소해정을 보내, 1명이 사망했다.

:전쟁의 경과: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38도선을 넘어 남쪽으로 침공했다.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었다. 미국은 침략 행위라고 비난을 했다. 1950년 7월, 소련이 결석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에서 국제 연합군의 파견 결의가 채택되어, 미군을 주체로 영국과 프랑스 등 합계 16개국에서 전투 부대를 파견했다.

북한 측은 부산에 가까운 낙동강까지 공격을 해왔지만, 맥아더가 인솔하는 국제 연합군의 인천 상륙을 계기로 한국 측이 9월에 서울을 탈환했다. 10월에는 38 도선을 넘어 평양까지도 점령했으며, 일부는 중국과 북한의 국경 주변까지 이르렀다. 같은 달, 중국이 인민 지원군을 파병하면서 형세는 역전되었다. 북한 측은 1951년 1월에 서울을 재점령했지만, 2개월 후에는 다시 한국군이 되찾았다. 그 후, 전선은 38 도선 부근에서 일진일퇴를 반복했다.

같은 해 7월에 정전 교섭이 시작되었지만, 경계선의 위치와 포로의 취급을 놓고 난항을 겪었다. 교섭을 유리하게 하기 위한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 되었다. 1953년 3월, 소련의 스탈린의 죽음을 계기로 교섭은 본격화 되었다. 7월에는 국제 연합군과 북한군, 중국군의 3자가 휴전 협정에 서명했지만, 한국은 하지 않았다.

휴전 협정으로, 한국과 북한을 나누는 새로운 군사 분계선이 그어지고, 경계선으로부터 남북으로 각각 2km가 비무장지대(DMZ)가 되었다.

:김일성()1912-94: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북한) 건국 당시의 최고자이다. 1972년에 신설된 국가 주석에 올라, 1994년 사망할 때까지 계속 최고 지도자의 자리에 있었다. 중국 동북부 등지에서 항일 유격대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일본이 패전한 후, 소련군과 함께 평양으로 들어갔다. 한국 전쟁에서는 인민군 최고 사령관이었다. 그 후 중소 대립을 배경으로, 독자적인 주체 사상을 내걸고 독재체제를 굳혔다. 1994년, 첫 남북 정상회담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직전에 급서했다.

:이승만()1875-1965:

대한민국(한국)의 초대 대통령이다. 독립 운동으로 투옥된 후, 미국으로 건너갔다. 상하이() 임시 정부의 수반도 맡았지만, 해방까지 미국을 거점으로 활동했다. 1945년 10월에 귀국하여 우파의 지지를 모았다. 1948년, 남한에서의 단독 선거를 거쳐 수립된 정부의 대통령이 되었다. 한국 전쟁 후에는 독재를 드러내 1960년 선거에서 4선을 했지만, 정권 부패와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학생들의 데모 4•19 혁명에 의해 사임을 하고 하와이로 망명했다.

조선 전쟁과 베트남 전쟁교과서 비교

제2차 세계대전 후,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이 직접, 간접적으로 말려든 조선 전쟁(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 이 두 전쟁에 대해서 동아시아의 중학생들은 어떻게 배우고 있을까.

일본 - 최소한의 사실을 담담하게 기술

일본의 중학교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도쿄 서적()의 새로운 사회 역사에서는, 조선 전쟁에 대해서, 단독 항목으로서는 채택하지 않고 있다. 국제 연합의 성립과 냉전 등에 관해 기술하고 있는 두 개의 세계와 아시아란 2페이지 정도의 단원에서, 식민지 해방과 아시아라는 항목 중에 7줄의 설명이 있을 뿐이다.

조선은 식민지에서 해방되었습니다만,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북쪽은 소련에, 남쪽은 미국에 점령되었고, 1948년에는 북쪽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북조선)이, 남쪽에 대한민국(한국)이 성립되었습니다. 1950년, 북한이 한국을 침공하면서 한국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 연합군이 한국을, 중국 인민 의용군이 북조선을 각각 지원하며, 전쟁은 1953년 휴전 협정이 맺어질 때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학습 지도 요령의 개정으로 인해, 수업 시간 수가 줄어들어, 분량이 삭감된 점도 있지만, 최소한의 사실만을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다는 인상이 강하다.

한편, 같은 출판사의 15년 전의 교과서에서는 같은 단원인 두 개의 세계와 아시아에 대해 7페이지를 할애하고 있었다. 국제 연합의 성립아시아 등에서의 여러 민족의 독립미국과 소련의 대립두 개의 세계와 차가운 전쟁한반도의 분열과 새로운 중국점령 정책의 전환한국 전쟁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 의 순서로 항목을 설정하고 인과관계를 포함하여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었다.

와타나베 노리오(辺) 사회편집 부장은 조선 전쟁과 일본과의 관련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페이지를 할애할 것이냐의 문제이다. 고교 입시 관계 상 최소한 알아둬야 할 것이 있으므로, 현재 교과서에서는 배경보다도 사실 관계만을 기술하는 경향이 있다. 전후 역사와 냉전 구조를 어떻게 취급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과제의 하나라고 말한다.

베트남 전쟁도 현재의 교과서에서는 3줄로만 기술하고 있다. 15년 전의 교과서에서는 배경 설명을 포함해 약 1페이지 정도가 할애되었다.

오쿠보 마키(真

한국 - 전황을 포함한 3페이지에 걸친 상세한 설명

조선 전쟁에 대해, 한국에서는 6월 25일 발발한 전쟁이라 하여 6•25 전쟁이라 부르기도 하고, 한국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교과서에서는 6•25 전쟁이란 표현을 많이 쓴다. 세계사 분야의 사회 2와, 한국사를 취급하는 국사(국정교과서 1 종류) 양쪽 모두에서 취급하고 있는데, 당연한 일이지만 국사 쪽에서 전쟁의 원인에서부터 영향에 이르기까지를, 3페이지에 걸쳐서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북한이란 북조선을 가리키고, 남한은 한국을 말한다.

북한 공산 정권은 소련과 비밀 군사 협정을 맺고 군사력을 증강하는 한편, 대한민국에 대한 무력 남침 준비를 서둘렀다.

북한은 (중략) 남한에 대해 평화 공세를 펴며 남침 의도를 숨기다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38 도선 전 지역에 걸쳐 남침을 감행하였다.

그 후, UN군의 파병과 인천 상륙 작전에 의한 반격, 중공군의 개입 등을 거쳐 1953년 휴전에 이르기까지를 지도를 사용해 가며 전황을 설명하고 있다.

한국 측만으로도 150만의 사상자를 냈으며 전쟁고아와 이산가족이 생겼고 국토가 황폐해 졌으며 경제 시설이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한 후, 전쟁의 영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남북한 간에는 전쟁으로 인하여 적대 감정이 팽배하게 되었고, 그 결과 평화적인 통일보다는 대결의 국면으로 치닫는 민족의 비극이 확대되어 갔다.

국사 편찬 위원회의 김득중() 박사는 먼저 가르쳐야 할 사항은 전쟁은 북한에 의한 남침이었으며, 많은 피해가 발생하였다는 사실이다고 말한다. 김 박사에 의하면, 1949년경부터 38 도선에서 많은 분쟁이 일어났다고 한다.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도 북진 통일을 주창했다는 사실들이 최근 연구에서 밝혀지기는 했지만 교과서에는 아직 반영되지 않은 상태라고 말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는, 국사 교과서에서 박정희 정권이 베트남에 국군을 파병했다라는 사실만이 1줄로 짧게 기술하고 있다.

사쿠라이 이즈미桜

중국 - 조국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음을 강조

중국에서 반수 이상의 학교가 사용하고 있는 인민 교육 출판사의 중국 역사에서는 조선 전쟁을 항미원조() 전쟁이라고 부른다. 미국의 침략에 저항하고 북한을 원조하는 전쟁이라는 의미다. 중화인민 공화국의 성립과 확립이라는 단원에서 5페이지가 할애되고 있다. 중국이 전쟁의 당사자였던 만큼 지도와 사진을 게재하는 이외에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기술로 시작된다.

1950년 6월, 조선에서 내전이 발발했다. 미국은 곧바로 파병을 하여 조선을 침략했다. 미군을 중심으로 하는 소위 유엔군은 38도선을 넘어 단번에 중국과의 국경인 압록강 부근까지 북진해 왔다. (중략) 미국 제7 함대는 중국의 대만 해협에 침입하여, 인민해방군의 대만 해방을 저지했다. 미국의 침략 활동은 중국의 안전에 있어서 중대한 위협이었다.

중국 역사 교과서 전문가인 게이오 대학 또완뤼총(聡) 준교수는 예전에는 미국 제국주의가 전쟁을 일으켰다고 가르쳤지만, 지금은 내전이 발발했다라는 표현으로 바뀌었다. 분명히 변화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또한, 전쟁 참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조국을 지키기위한 싸움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중국 정부에 파병 원조를 요청해 왔다. 미국에 저항하고 조선을 도와, 내 가정과 조국을 지키기 위해, 1950년 10월 펑더화이(徳懐) 를 사령관으로 하는 중국 인민 지원군이 조선 전선으로 향하여, 조선 군민과 함께 미국 침략자에게 반격을 가했다.

한편,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는 세계사 교과서에서 다루고 있다. 미군의 사진이 1장이 게재되어 있지만, 설명은 3줄 뿐이다. 미국은 1960년대 초부터 베트남을 침략했다. 베트남인들을 이용해 베트남 사람을 공격했고, 나아가서는 직접 출병까지 했지만, 실패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사토 가즈오

대만 - 미국과 대만 관계 변화에 초점

대만 교과서에서는 조선 전쟁을 한전()이라고 표현한다. 북조선을 북한, 한국을 남한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세계사, 중국사, 대만사 등 전 분야에 걸쳐서 다루고 있다. 한편, 베트남 전쟁은 세계사뿐이다.

널리 사용되고 있는 남일서국()의 국민 중학•사회의 세계사 부분에서는 제2차 대전 후의 지역 분쟁이란 항목에서, 그림과 사진을 포함해 약 1페이지 정도를 조선 전쟁에 대해 할애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도 1페이지 정도로 다루고 있다. 조선 전쟁의 발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950년, 북한은 소련의 강력한 지시로 남한으로 진공했다. 유엔 안보리는 남한을 지원하기 위한 출병을 결의하고, 미국의 맥아더 장군이 총사령관이 되었다.

또한, 대만사 부분에서는 4줄 정도로 다음과 같이 다루고 있다.

정부를 대만으로 옮긴 당초 정세는 위기적이었지만, 한전의 발발로 미국은 함대를 파견하고 대만 해협의 공동 방위에 임하여, 정세는 점차 안정되었다. 1954년에는 중미 상호 방위조약을 맺어 중미 협력을 강화하였다.

중국사 부분에서는 중공 정권의 개황이란 항목에서 항미원조(()) 지원군의 사진을 싣고, 3줄 정도로 다루고 있다.

국민당 정권 하인 1983년에 역사 과정 표준에 근거한 교과서에서는, 세계사에서 조선 전쟁에 대해 1페이지 크기의 지도를 싣고는 있지만, 설명은 극히 짧다.

남일서국()의 교과서 편집 지도 위원인 초우호이민(恵) 정치대학 역사학부 교수는 예전에는 대학생들도 한전에 대해 거의 몰랐다. 하지만, 한전은 중요한 사항으로, 전쟁이 없었다면 대만의 지위가 바뀌었을 지도 모른다라고 하며, 채택하게 된 경위를 자세히 말해 주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는 미국은 공산 세력이 동남아시아를 석권하는 것을 막으려고 베트남의 전장에 파병하여 개입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리저리로 도망치는 베트남 어린이들과 미국의 반전 데모 사진을 싣고 있다.

다무라 히로쓰구

지식인 20 명에 듣는다 - 동아시아 근현대사의 10 대 사건은? 15

박유하( ) 세종대 부교수

인간의 욕망을 그대로 들춰내는 근대

왜 역사를 배우는 것일까. 그것은 오늘날을 사는 사람으로서 현재의 구조를 알기 위함이다. 동아시아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중요한 사건을 선택했다. 전쟁과 식민지, 냉전과 관계되는 사건을 중심으로 했다.

근대는 제국주의의 시대이며, 인간의 욕망을 가장 잘 들춰낸 시기이기도 하다. 그 욕망을 숨기기 위해, 차별과 지배라는 폭력이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구조화되었다. 교통수단의 발달로 인해 이제까지는 잘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도 쉽게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정치와 자본의 힘에 쫓겨 사람들은 움직이며 그 속에서 만남과 갈등이 생겨난다.

청일 전쟁은 류큐()와 홋카이도() 지배와 더불어, 근대 일본의 제국주의적 욕망이 그대로 표출된 최초의 대외 전쟁이었다. 그 결과, 대만을 식민지로 획득했다. 러일 전쟁은, 조선을 지배하에 두기 위한 전쟁이었으며,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다. 와 함께 사람들도 이주하기 시작했다. 개척이라는 명목 하에, 많은 사람들이 제국의 욕망을 안고 대륙으로 건너갔지만, 그 중 많은 사람이 일본에서는 발붙일 곳이 없었다는, 실제로는 기민()이었다는 이중구조에 주목하고 싶다.

일본의 중국으로의 세력 확장은 근대 이후의 일본이 대만과 조선의 지배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자국에 대한 위협이라는 구실로 삼아, 중국을 지배하려는 욕망을 품는 과정에서의 사건이다.

전후 일본의 출발은 민주화와 전쟁의 포기라는 전후 이념이 어떻게든 지금까지는 지켜져 왔다는 사실을 오늘날의 일본 젊은이들이 좀 더 확실하게 인식해 주었으면 하는 희망으로 선택했다. 로 들 수 있는 전후의 한계와 한중일 역사 갈등과도 관계가 있는 사항인데, 전후의 이념을 상기하면서도, 전쟁이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책임 의식이 모자랐던 사실도, 함께 논의의 대상으로 했으면 좋겠다. 이것은 도쿄 재판에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책임 추궁이 없었다는 점이 영향을 주었다는 판단이다.

역사를 둘러싼 갈등은 야스쿠니 신사와 종군위안부문제들을 놓고, 근대 이후의 일본과 중국, 한국에 있어서의 갈등이다. 각 나라가 자국에게 이로운 것만을 가르쳐 왔다는 것도 한 요인이 되겠지만, 일본의 전후의 한계를 재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이하는 순위를 정하지 않았는데, 이토 히로부미()와 명성황후의 암살에 관해서이다. 평가는 접어두고라도, 이 두 죽음에 대해 모른다면 한일 간에는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젊은 사람들이 알아 두었으면 한다. 난징() 학살도 마찬가지다. 이웃 나라의 사람들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들은, 동아시아에 사는 사람으로서 알아 두어야 할 것이다.

아시아 태평양전쟁은, 일반적으로 미국과의 전쟁처럼 인식되지만, 배후에 아시아와의 전쟁과 식민지 지배가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일본의 패배만을 기억하면, 피해자로서의 일본상이 중심이 되어 버린다. 대만은 한국에 비해 친일적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중국 공산주의와 대립하는 구조에서 나온 결과다. 중국에 편입되어 버린다는 위기감에서, 일본 식민지 시대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계속 가져야만 했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반도의 분단과 전쟁이다. 분단은 한반도 내부에서의 문제 뿐 만이 아니라 일본 식민지 지배의 결과물이며, 미소가 한반도에 개입한,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쟁이라는 측면이 있다. 이후의 냉전 구조와도 깊게 관여하는 사건으로서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특히, 1948년 제주도에서 일어난 주민들의 봉기를 무력으로 진압한 4•3 사건은, 이러한 전 단계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제주도에서 일본으로 피한 사람들도 있어, 재일조선인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4•3 사건도 함께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인터뷰사쿠라이 이즈미(桜)

약력

박유하. 1957 년생. 게이오 대학, 와세다대학 대학원에서 일본 근대문학을 공부했다. 저서로는 일한 상호간의 자제와 관용을 호소한 화해를 위해서(헤본사()가 있다. 오사라기 지로(郎) 논단상을 수상했다.

리스트

청일 전쟁과 대만의 식민지화

러일 전쟁과 조선의 식민지화

일본의 중국으로의 세력 확장과 일중 전쟁

전후 일본의 출발전쟁 포기와 민주화

전후의 한계와 한중일의 역사를 둘러싼 갈등

이하, 순서를 정하지 않는다

명성황후와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

난징() 학살

아시아 태평양 전쟁과 일본의 패배

중화인민 공화국 성립과 전후의 대만

한반도의 분단과 전쟁제주도 4•3 사건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