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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발포명령 최인규내무 동생왼손도 모르게 한평생 장학 헌신

4•19 발포명령 최인규내무 동생왼손도 모르게 한평생 장학 헌신

Posted February. 20, 2009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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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픔의 세월과, 시대의 모진 질곡의 소용돌이가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열심히 공부하여 세상의 빛이 되라고 하셨지만, 아직 저희는 이사장님의 뜻을 따르지도 못하고 있는데.

7일 오전 서울 종로구 강북삼성병원 장례식장.

88세로 생을 마감한 한 남자의 영결식에서 서정희 씨(56이솝러닝 전문위원)가 6000여 명의 장학생을 대표해 추모사를 읽어 내려가다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열세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해 졸업한 것이 학력의 전부인 사람. 친형을 형장의 이슬로 떠나보내고 눈물조차 흘리지 못했던 사람. 수백억 원의 재산을 6000여 명의 학생에게 장학금으로 전달하면서도 본인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았던 사람.

서 씨가 추모사를 읽는 동안 35년 전 두 사람의 인연을 맺게 해준 전직 신문기자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1975년 1월 서울의 만남

1974년 12월,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 운동장.

스물한 살의 청년이었던 서 씨는 고개를 숙인 채 땅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심리학과 합격자 명단에서 자신의 이름을 발견한 순간, 합격의 기쁨보다는 등록금 걱정이 앞섰기 때문.

고교를 졸업한 지 4년. 입주 과외, 막걸리 배달, 시장 행상. 먹고살기 위해서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아예 원서를 내지 않았다면 이토록 아쉽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며칠을 고민하던 서 씨는 불현듯 신문에 소개된 한 여학생이 독지가로부터 등록금 도움을 받았다는 동아일보 기사를 떠올렸다.

무작정 동아일보로 편지를 보냈다. 서 씨의 편지를 본 사람은 사회부 기자이던 이용수(1998년 퇴사) 서울낫도 대표. 이 대표는 서 씨의 사연을 1975년 1월 27일자 동아일보 휴지통란에 소개했다.

기사가 나간 뒤 서 씨에게 한 중년 남자로부터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약속 장소는 서울 마포구 신민당사 앞 찻집. 서 씨를 만난 중년 남성은 등록금 25만 원을 내고 받은 영수증을 건네고는 이름도 알려주지 않은 채 찻집을 빠져나갔다.

그 뒤로 그는 세 차례 더 서 씨의 등록금을 내주었다. 수소문 끝에 서 씨는 그의 이름이 최형규라는 것, 택시회사를 경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찾아갔지만 그는 인사도 받지 않았다.

졸업 뒤 직장인이 된 서 씨는 매년 5월 그를 찾아갔지만, 미리 알고 피하기라도 하듯 매번 자리에 없었다.

이 사람과 서 씨, 그리고 두 사람의 인연을 맺어준 이 대표 등 세 사람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인 것은 1990년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한 음식점에서였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는 내 이야기를 내가 죽기 전에는 세상에 말하지 말아 달라는 요청에 대한 확답을 받고 나서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한상준 always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