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사(소극적 안락사)를 인정하는 대법원의 첫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능환 대법관)는 21일 환자가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숨만 쉬고 있을 뿐 의식을 회복할 가능성이 없는 상태에 빠져 있고 스스로 치료 중단 의사를 내비쳤다면 인간답게 죽을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특히 대법원은 어떤 경우에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는지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하면서 이 기준에 부합하면 반드시 소송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치료 중단이 허용된다고 밝혀 그 파장이 작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대법원의 존엄사 인정에 따라 연명치료 중단의 기준과 방식, 남용 대책 등을 담은 존엄사법 제정을 위한 움직임도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날 식물인간 상태인 김모 씨(76여)와 가족들이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해 달라며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김 씨에게서 인공호흡기를 떼어내라고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용훈 대법원장을 포함한 13명의 대법관 가운데 9명이 김 씨의 존엄사를 인정해야 한다는 다수의견을 냈다.
대법원은 환자가 의식이나 중요한 생체기능을 회복할 수 없는 상태로 짧은 시간 안에 사망할 것이 명백하다면 이미 죽음의 과정이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며 이런 환자에게 연명치료를 강요하는 것은 오히려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해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대법원은 전문가들의 의학적 소견을 종합해 판단할 때 김 씨는 회복 불가능한 사망 단계에 들어간 것으로 판단할 수 있으며 김 씨가 평소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연명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혀 왔던 점을 고려하면 김 씨가 지금의 연명치료를 계속할 뜻이 없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김 씨 가족들은 판결 직후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사회구성원들의 바람을 담은 판결이라며 환영했다. 세브란스병원도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대법원 판결문이 접수되는 대로 가족과 병원윤리위원회의 의견을 수렴해 김 씨의 연명치료 중단을 결정할 것이라며 판결을 수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상록 이진한 myzodan@donga.com liked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