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이 2010년 한일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아키히토() 일왕의 방한을 제안한 것에 대해 전문가들은 방한이 성사되면 한일관계를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획기적 계기가 될 것이라면서도 무리한 방한 추진은 역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아키히토 일왕이 방한을 원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제강점에 대한 일왕의 사과 수준과 이에 대한 한일 양국민의 반응에 따라 한일관계가 되레 갈등적 퇴행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는 우려 탓이다.
구체적 사과와 반성 없는 방한은 무의미
이원덕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는 일왕이 방한해 일제강점과 전후 처리 등 역사 문제에 대해 우리 국민이 납득할 수 있을 만큼의 구체적 사과와 반성을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일왕이 일본 국민을 대표해 과거사 문제를 매듭지을 수 있는 성명이나 공식 발언을 하지 않으면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설명이다.
또 과거사 문제의 해결을 위한 일왕의 일정과 관련해 전문가들은 1970년 독일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폴란드를 방문해 유대인 희생자 기념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한 것처럼 일왕이 고종과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경기 남양주시)을 참배하거나 강제위안부 할머니들이 생활하는 경기 광주시 나눔의 집을 찾는 방안을 거론했다.
일왕 방한을 과거사 청산 보증수표로 요구하면?
김호섭 중앙대 국제관계학과 교수는 일본이 일왕의 방문을 한일의 모든 과거사가 일거에 청산됐다는 보증수표로 인식할 경우 한일관계는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는 1992년 중-일 수교 20주년을 맞아 아키히토 일왕은 중국을 방문해 사죄했지만 현재의 중-일관계가 좋다고 볼 수 없다며 일왕 방문에 과거사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다는 순진한 낙관은 금물이라고 말했다.
국민들 사이에 반일감정이 여전히 강한 상황에서는 일왕의 사과 내용과 관계없이 방한 자체가 진정성 없는 이벤트로 여겨질 가능성도 있다. 특히 일왕이 계란세례를 받는 일 등이 생길 경우 일본의 극우세력을 자극해 한일관계를 훼손하는 결과가 야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 국민 공감대 없는 방한은 시기상조
한일강제병합 100년이라는 2010년의 상징성에 얽매인 나머지 한국의 외교적 압력으로 일왕이 오는 모양새가 돼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많다. 과거사의 피해자는 한국인만큼 사과를 위한 일왕의 방한은 일본이 스스로 선택하는 형태가 돼야지 한국이 이것저것 요구하는 것은 모양이 좋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일본이 역사문제에 전향적인 민주당으로 정권교체를 이뤘지만 아직 일본 국민들 사이에 일왕 방한에 대한 컨센서스(동의)가 없기 때문에 더욱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일왕이 현재 고령(76세)이고 한일 간 화해에 기여하고 싶은 생각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 국민의 자발적인 공감대가 먼저 형성돼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 외무성 내부에서는 일왕이 방한해 사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분위기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윤완준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