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STX팬오션을 비롯한 14개 회사가 정부 권유로 국제기준에 맞춘 새 회계제도를 도입했다. 삼성전자와 LG전자를 포함한 27개사는 올해 1분기부터 새 제도에 따라 연결재무제표를 만들어 세무신고를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작년 말 법인세법상 기준이 되는 회계제도는 기존 회계제도라며 재무제표를 재작성하라는 공문을 보냈다. 결산을 앞두고 바뀐 회계제도에 따라 법인세를 내려고 준비했던 기업들은 갑자기 뒤통수를 맞은 꼴이 되고 말았다. 법인세 신고기한인 3월말에 맞추어 다시 재무제표를 작성하느라 기업들은 연일 야근을 하며 애를 먹고 있다.
금융감독원은 2011년부터 국제기준에 따른 회계제도를 도입하기로 하고 작년부터 기업에 조기 도입을 종용했다. 기업들은 회계제도 변경에 따른 세 부담 증가를 걱정했다. 대한상공회의소 전국경제인연합회 상장사협의회 등 경제단체와 공인회계사협회는 국제 회계기준의 도입에도 불구하고 세법의 변화가 없다면 기업의 비용 부담이 늘어날 것이라며 세법 개정을 수차례 건의했다. 그러나 아직 개정안조차 마련되지 않았다.
기획재정부는 내년부터 상장기업과 금융회사에 새 회계제도가 의무적으로 적용되기 때문에 올해 안에 세법을 개정하면 된다고 설명한다. 금융감독원은 작년과 올해 도입한 기업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니 기업이 알아서 처리하고 책임지라는 식이다. 정부 방침에 적극 호응해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에 이르는 비용을 들인 기업만 바보가 된 것이다. 기업들은 회계법인 컨설팅 비용이나 전산시스템 교체비용의 일부를 세액 공제해 주도록 작년 말 건의했지만 정부는 묵묵부답이다.
기업 경영에 미치는 영향이 큰 회계 제도를 갑자기 바꾸면 기업경영에 혼란이 초래된다. 기업 규모가 작을수록 세 제도에 따른 부담이 커진다는 지적도 나온다. 물론 새 제도는 글로벌 시장에서 국제기준에 맞는 재무제표로 기업의 신뢰도를 높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관련 법 개정안을 조속히 확정해 기업 의견을 수렴할 필요가 있다. 내년 의무 시행을 앞두고 연말까지만 개정하면 된다는 생각은 관료적 행정편의주의다.
이명박 정부가 섬기는 정부를 국정 슬로건으로 내걸고 출범한지 내일로 2주년을 맞는다. 국정 슬로건은 공복인 공무원이 열심히 따르고 실천하기 위해 만든 목표이다. 정부의 권유대로 따랐다가 애를 먹는 기업들은 군림하는 정부라는 말이 더 피부에 와 닿을 것 같다. 기업을 괴롭히는 관료주의는 섬기는 정부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