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한 독재자들의 공통점은 부정부패로 축적한 돈을 스위스 은행 비밀계좌에 숨겨뒀다는 것이다. 독재자들은 권력 유지를 위한 통치자금이나 권력 상실 이후에 대비해 비자금을 쌓아둔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필리핀 대통령은 스위스 은행 비밀계좌에 6억2400만 달러를 감춰뒀다가 적발됐다. 전범 재판 중 사망한 슬로보단 밀로세비치 전 유고 대통령도 330만 달러의 스위스 비밀예금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통치자금 관리 전담 조직인 노동당 38호실과 39호실을 지난해 39호실로 통합했다. 통치자금은 미사일 등 무기와 마약 및 위조달러 거래 및 각종 외화벌이 사업으로 조성한다. 이 돈은 김 위원장이 독재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측근들에게 최고급 승용차나 롤렉스시계 같은 선물을 사주고 자신과 일족의 초호화 생활을 유지하는데 사용한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북에 정상회담 대가 4억5000만 달러를 포함해 약 70억 달러를 제공했으며 30억 달러가 현금이었다. 이 가운데 상당 부분이 통치자금으로 쓰였을 것이다.
김 위원장이 스위스 은행에 숨겨뒀다는 비자금 40억 달러(약 4조5388억 원)의 대부분이 룩셈부르크 은행들로 옮겨졌다고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가 보도했다. 세계적 금융위기 이후 스위스 정부가 돈 세탁 규제를 강화하자 북이 조치를 취했다는 것이다. 김정일 비자금 40억 달러 은닉설은 2006년 미국의 대북 금융제재 때 처음 불거졌다. 북한은 당시 황당무계하다며 발끈했다. 미국이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에서 발견된 2400만 달러를 동결하자 북한이 전전긍긍한 것도 김정일 자금이기 때문일 것이다.
올 1월 김 위원장은 쌀밥과 고깃국을 약속한 김일성 유훈을 실천하지 못했다며 최단 기간 안에 인민생활 문제를 풀겠다고 했다. 비자금 40억 달러에서 10분의 1인 4억달러만 풀어도 북한이 올해 부족할 것으로 추정되는 쌀 100만t을 사고도 남는다. 이 돈이면 인민의 쌀밥과 고깃국 문제를 상당 기간 해결할 수 있다. 인민이 굶주리고 불만이 높아지면 천문학적인 비자금을 쌓아두었다고 안락한 노후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권 순 택 논설위원 maypo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