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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대통령의 이니셜 약칭

Posted March. 20, 2013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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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입대 후 신병 훈련소에서 겪은 가장 낯선 경험은 20년 이상 불리던 이름을 잃은 것이었다. 모든 신병은 56번 훈련병처럼 일련번호로 불린다. 이름 대신 번호로 불리니 사회와 이어주는 끈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공허함을 느꼈다. 일반인도 이럴진대 국민의 지지를 밑천으로 살아가는 정치인에게 무명()과 무관()의 고통은 견디기 어렵다. 그들이 인사나 선거철이 되면 본인 부고()만 빼고 신문에 이름이 실리면 무조건 좋다고 말하는 게 이해가 간다. 이름과 호칭은 정치인에겐 존재의 의미다.

1950, 60년대 정치인들은 아호()로 불렸다. 우남 이승만, 백범 김구, 해공 신익희, 유석 조병옥, 죽산 조봉암. 이 박사 조 박사처럼 당시 흔치 않은 박사 학력이 따라붙어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권위주의 정권 시대인 1970년대에는 영문 이름의 약자를 이용한 이니셜 호칭이 등장했다. HR(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JP(김종필 전 국무총리)와 같이 공화당 실세들이 영문 약자로 불리며 비밀스러운 냄새를 풍겼다. 박정희 대통령도 청와대 안팎에서 프레지던트 박을 뜻하는 PP로 지칭됐다. 3김 시대 이후엔 YS(김영삼 전 대통령) DJ(김대중 전 대통령) MB(이명박 전 대통령)처럼 대통령 호칭으로 굳어졌다. DJ는 후광(), YS는 거산()이라는 아호가 있었지만 언론이 영어 이니셜 약칭을 선호하는 바람에 요즘은 들어보기 어렵다.

미국에서도 대통령을 JFK(존 에프 케네디)처럼 약칭으로 부르긴 하지만 우리처럼 일반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입에 담기 싫은 금기어나 비밀스러운 일을 할 때 이니셜을 쓴다. 경호나 의전 차원에서 대통령을 코드네임으로 지칭하는 일도 있다. 한국 사회에서 이니셜 애칭이 생겼다는 것은 크든 작든 권부()의 중핵에 들었다는 신호다. 대권을 노리는 일부 중진 의원들이 자신의 이니셜을 불러주며 언론에 써달라고 주문하는 이유다.

박근혜 대통령이 자신에 대한 호칭을 영문 이니셜을 딴 GH나 PP(President Park) 대신 박 대통령으로 해달라고 주문했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이런 요구를 한 적이 없다가 갑자기 영어 이니셜이 싫다고 밝히고 나서는 이유가 궁금하다. DJ YS MB가 영어 약칭에 대해 코멘트한 걸 들어본 기억이 없다. 애칭이나 약칭은 국민과 언론이 지어주는 것이다. 대통령이 배 놓아라 감 놓아라 할 일은 아니다. 대통령이 주문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바뀔 일도 아니다. GH를 great harmony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박 대통령이 국민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면 약칭이 갖는 이미지도 좋아질 것이다.

박 용 논설위원 par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