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5일 광복절에 박근혜 대통령이 연설하는 것을 TV에서 보면서 의외라고 생각했다. 일본에 과거를 직시하라고 요구하는 한편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저는 대다수 일본 국민들은 한일 양국이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을 함께 만들어 가기를 염원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미 양국 국민들 사이에는 신뢰의 저변이 매우 넓고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들과 많은 사람들은 한류와 서로의 문화를 공유하고 마음을 나누며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말씀대로다. 서울에 체재하고 있는 나는 서강대 한국어교육원을 엊그제 졸업했지만 그곳에는 젊은 일본인 여성이 넘친다. 우리 반에서도 딸 같은 일본인 5명이 졸업했다.
예를 들어 아야코 씨는 캐나다에서 만난 한국인과 친구가 된 것을 계기로 나고야()의 회사를 그만두고 유학 왔다. 앞으로 한일 양국에 걸친 일을 찾는다고 한다. 한복을 입고 졸업식에 참석한 에리코 씨는 원래 도쿄의 예능 프로덕션에 근무하고 있었다. 한일 혼성 그룹을 만들어 해외에 진출시키는 것이 꿈으로 다음은 영어를 배우기 위해 필리핀으로 향한다. 그리고 가족 모두가 한류 팬이라는 리호 씨는 오사카()의 대학에 돌아가 한국어 교사를 목표로 공부할 예정이다.
한편으로 서울의 서점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간 소설이 산처럼 쌓여 있다. 애니메이션과 만화는 물론이고 여성들 사이에서는 일본 패션 붐이 조용히 일고 있다. 얼마 전 일이 있어 삿포로에 갔을 때 공항에 골프가방을 맡기는 한국인이 가득한 데 놀랐다.
박 대통령이 양국 국민의 저변은 넓다고 말한 것은 그런 현실을 알았기 때문임이 틀림없다. 그는 정치가 국민들의 이런 마음을 따르지 못하고 과거로 돌아간다면 새로운 미래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라고 축사를 이어 갔다. 일본에 대한 주문뿐만 아니라 자성의 마음도 조금 담겨 있었던 것은 아닐까.
같은 날 도쿄()에서 열린 전국 전몰자 추도식에서 행한 아베 신조() 총리의 추도사는 이에 호응하지 못했다. 아시아 피해자들에 대한 반성과 애도의 뜻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내를 향한 추도식이라고 하지만 최근 20년 동안 많은 총리가 언급해 온 말을 피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안타깝다. 식민지 지배와 침략을 사죄한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 담화도 언젠가 바꿀 것이라고 한국이 경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일본을 향해 야유를 퍼붓는 한국 분들에게도 호소하고 싶다. 무라야마 담화를 바꾸지 말라며 왜 일본 정부는 지금까지 반성도 사죄도 하지 않고 있다는 주장이 버젓이 통용되고 있는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사죄한 1993년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 담화를 바꾸지 말라며 왜 일본 정부가 이 문제를 일관되게 부인해 온 것처럼 목소리를 높이는가.
한국에서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해도 일본 정부가 과거에 아시아여성기금을 만들어 기부금을 모아 보상금을 전달하는 사업을 진행했던 것은 사실이다. 역대 4명의 총리가 사죄의 편지를 동봉했고 이를 받아들인 할머니도 적지는 않다. 사업의 선두에 선 인물은 다름 아닌 무라야마 씨와 고노 씨였다. 이런 사실을 무시하는 듯한 일방적인 비판이 모처럼의 무라야마 담화와 고노 담화를 곤경에 몰아넣는 한 요인도 되고 있다.
그런데 한일 관계를 양국 정상은 어떻게 하면 좋은가. 박 대통령의 자서전에 눈길 끄는 사실이 적혀 있는 것을 떠올린다. 어머니를 잃은 그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고 있던 1979년, 서울을 방문한 지미 카터 미 대통령이 주한미군의 철수를 주장해 박정희 대통령과 격론을 벌이면서 험악한 관계에 빠졌을 때의 일이다.
부인 로절린을 상대한 그는 카터 대통령이 좋아하는 조깅을 화제로 하면서 건강한 사람에게는 매우 좋지만, 수술한 지 얼마 안 된 사람에게는 좋지 않다고 말했다. 한국전쟁의 상처가 아직 치유되지 않고 큰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데 미군을 철수하는 것은 환자에게 조깅을 시키는 것과 같다고 한국의 실정을 호소한 것이다. 이것이 카터 씨에게 전해져 단번에 분위기가 바뀌면서 철수 문제는 백지로 돌아갔다고 한다.
지금의 한일 관계를 풀기 위해서는 이런 재치와 지혜가 필요하다. 상대의 마음을 흔드는 말의 힘이 필요하다. 아쉬운 것은 지금 두 정상 사이에는 과거의 박근혜 아가씨가 없다는 점인지도 모르겠다.
8월 15일 두 정상의 말은 엇갈렸다. 하지만 오로지 자국민의 고귀한 희생과 노력을 찬양한 두 사람의 입에서는 실은 두 개의 똑같은 키워드가 나왔다.
박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야말로 건국 이래의 핵심적인 가치라고 말하며 평화라는 말을 반복했다. 아베 총리도 자유와 민주주의를 존중하고 평화의 길을 걸어왔다고 말하고 세계의 항구 평화에 매진하겠다고 힘을 주었다.
접점은 확실히 있다. 이를 실마리로 할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