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나쁜 남자’ 맞다. 10대 때부터 무전취식 절도 강도 등 숱한 범죄로 소년원과 교도소를 들락날락거리며 어둠의 세계에서 살았다. 어릴 적 어머니와 사별한 뒤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평생 가족과도 소원했다. 34세 때 술집에서 싸우다 칼에 맞아 비명횡사했다. 그런 그가 영화와 법학 교재에도 등장하는 인권의 아이콘으로 길이 남으리라는 것은 스스로도 꿈도 못 꿨을 것이다. 멕시코계 미국인 에르네스토 미란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다. 당신의 발언은 법정에서 당신에게 불리하게 사용될 수 있다.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으며….” 전 세계 주요 국가의 수사관들은 피의자를 신문하기 전 피의자에게 이런 권리가 있음을 번거롭고 불편해하면서도 알린다. 1966년 6월 13일 미 연방대법원이 수사기관으로부터 이 같은 권리를 고지받지 못한 상태에서 이뤄진 진술은 유죄의 증거로 쓸 수 없다는 ‘미란다 원칙’을 확립한 지 50년. 강압수사는 줄었고 수사하기는 참 힘들어졌다.
▷1963년 3월 18세 소녀를 납치해 강간한 혐의로 애리조나 주 법원에서 ‘단기 20년 장기 30년’을 선고받은 미란다는 형사소송 절차의 큰 원칙을 세운 미 연방대법원의 역사적 판결로 일단 무죄로 풀려났다. 하지만 사이가 틀어진 동거녀가 미란다로부터 범행 이야기를 직접 들은 적이 있다고 밝히면서 애리조나 주에서 재심이 진행돼 결국 원심 형량 그대로 유죄가 확정됐다. 사필귀정이었다. 재심에선 연방대법원이 증거로 쓸 수 없다고 판시한 미란다의 당초 진술을 제외한 다른 증거들이 채택됐다.
▷미란다는 1972년 가석방된 뒤 미란다 원칙이 담긴 카드에 사인해 1달러 50센트씩 받고 팔았다. 미국에서 ‘미란다 경고’나 ‘미란다 권리’로 불리는 피의자 인권 존중 원칙이 세워진 사건의 장본인이라는 것이 생계수단도 됐다. 강력범죄를 저질렀지만 무죄로 풀려났을 때 미란다는 쾌재를 불렀을지 모르지만 연방대법원은 혐의자의 체포와 수사에서 적법 절차(due process)의 원칙을 세운 것이다.
한기흥 논설위원 eligiu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