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남부에서 발굴한 일본식 무덤의 주인은 과연 누구일까.’
광주 광산구의 월계동 고분군 등지에서 발견된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은 한반도 전통 고분 양식과는 사뭇 다르다. 이름 그대로 앞쪽은 사다리꼴, 뒤쪽은 원형으로 만들어진 열쇠 모양의 무덤. 일본 ‘고훈(古墳)’ 시대(3∼7세기) 무덤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그간 한반도에 존재하는 왜계(倭系) 고분들의 주인이 5세기 일본에서 백제로 건너온 ‘왜인 용병’일 가능성이 최근 제기됐다. 박천수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교수가 최근 발표한 논문 ‘왜계 고분으로 본 백제와 왜’를 통해서다. 박 교수는 “출토 유물과 삼국사기, 일본서기 등 각종 문헌 분석 결과 무덤 주인은 일본 지배층이 아닌 중하급 무사로 보는 게 타당하다”며 “일부 일본 학계가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은 설득력이 없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했다.
문헌에 따르면 일본 무사들이 한반도로 넘어온 최초의 기록은 405년경이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는 “일본에 머물던 백제 태자 전지왕이 아버지 아신왕이 죽자 왜병 100인의 호위를 받으며 귀국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후 일본 호위무사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하나 광개토대왕릉비에 “왜가 배로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들이 백제·고구려 전쟁에 참가했을 개연성이 크다.
박 교수는 “5세기 전반의 전남 고흥군 안동고분과 야막고분은 분구(墳丘) 표면에 돌을 깔아 마무리하는 즙석(葺石) 시설이고 일본식 대도와 갑옷 등의 유물이 나와 무덤 주인이 일본인임을 드러냈다”며 “해양 군사 요충지에 위치했고, 왕실에서 하사한 것으로 보이는 금동관이 출토돼 백제 용병으로 활약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479년 백제 동성왕 역시 전지왕과 비슷하게 일본 군사 500인을 대동하고 삼근왕 서거 이후 귀국했다. 이들 500명이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는 6세기 전반 무덤은 주로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된다. 일본 규슈지역 횡혈묘(橫穴墓)와 닮았다. 출토 유물은 백제 왕실용품인 금박유리 등이 함께 나왔다.
일본의 몇몇 학자는 이 고분들을 근거로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했다. 하지만 박 교수는 “무덤 형태가 일정한 계통 없이 5∼6세기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졌다”며 “왜계 고분의 주인들이 한반도에서 지배적 세력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활동한 무사 계급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밝혔다.
유원모 onemor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