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처음으로 ‘최고연구과학자(Chief Research Scientist)’ 직책을 신설하고 인공지능(AI) 분야 세계적 석학 두 명을 동시에 영입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사진) 주도로 글로벌 AI 인재 영입에 전사적으로 역량을 기울이는 모습이다.
4일 삼성전자는 미국 프린스턴대 세바스찬 승(한국명 승현준·52) 교수와 펜실베이니아대 다니엘 리(이동렬·49) 교수를 부사장으로 영입했다고 밝혔다. 승 신임 부사장은 삼성리서치(SR)에서 향후 삼성전자의 AI 전략 수립 및 선행 연구 자문을 담당하게 된다. 삼성전자는 승 부사장 영입을 위해 CRS 자리를 만들고 ‘1호 CRS’로 임명했다. 삼성전자 측은 “해당 기술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과 전문성을 보유한 인력을 위해 최고기술책임자(CTO)처럼 C레벨급으로 신설한 직책”이라고 설명했다.
승 부사장은 뇌 연결망 연구인 ‘커넥톰(connectome)’ 분야 1인자인 ‘스타 과학자’다. 커넥톰은 일종의 뇌 지도로 뇌신경 세포 하나하나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파악하는 연구다. 870억 개의 신경세포 하나당 각 1000개 정도씩 연결된 접합부(시냅스)가 연구 대상이다. 오카베 시게오 도쿄대 의대 교수와 같은 뇌 과학 전문가들은 “뇌 연결망 연구는 1970∼1980년대 신경망 원리를 바탕으로 한 현재의 AI 기술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견해를 내놓고 있다. 한 과학계 관계자는 “커넥톰이라는 말 자체가 승 교수 덕분에 대중적으로 알려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 분야의 대표자”라고 평가했다.
이 신임 부사장은 AI로보틱스 분야 전문가로 삼성리서치에서 차세대 기계학습 알고리즘과 로보틱스 연구를 담당할 예정이다.
두 사람은 모두 미국에서 태어난 한인 2세 과학자다. 승 부사장은 저명한 철학자인 미국 텍사스대 석좌교수 승계호 박사의 아들이다. 이 부사장은 KAIST 재료공학과 초빙교수를 지낸 미시간공대 이종길 교수의 아들이다. 본래 전공인 물리학 대신 AI 분야 연구에 뛰어든 ‘융합형 인재’들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승 부사장은 미국 하버드대에서 물리학으로 박사학위까지 받았지만 신경과학에 대한 궁금증으로 AI 분야에 발을 들였다. 이 부사장 역시 고체물리를 전공했지만 자동화 연구로 방향을 틀었다. 벨랩 연구원 출신인 두 사람은 AI 태동기 한참 전인 1999년, 인간의 뇌신경 작용에서 영감을 받아 인간의 지적 활동을 그대로 모방한 컴퓨터 프로그램을 세계 최초로 공동 개발했다. 관련 논문은 당시 영국 네이처지에 실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정보기술(IT) 업계에서는 이번 석학 영입 과정에서 이 부회장 역할이 컸을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이 부회장이 경영 복귀 직후인 3월 캐나다 토론토 등으로 해외 출장을 떠난 배경에는 현지에서 AI 인재를 영입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도 ‘S급 인재’ 영입을 위해 직접 뛰어다녔다. 재계 관계자는 “세계적으로 AI 인재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주요 글로벌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AI 인재를 선점하고 있다”며 “이 부회장도 아버지처럼 직접 나서 ‘AI 구루’들을 섭외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실제 인력풀이 아직 제한적이다 보니 주요 업체들 간에 서로 인력을 뺏고 뺏는 일이 빈번하다. 지난해 중국 바이두는 마이크로소프트(MS)에서 AI 사업을 총괄해왔던 치루(齊魯) 부사장을 최고운영책임자(COO)로 데려왔다. 올해 4월 애플은 구글에서 AI 업무를 담당했던 존 지아난드레아 수석부사장을 최고경영진으로 영입했다. 삼성전자도 올해 1월 구글과 MS 출신의 래리 헥 박사를 영입했다.
삼성리서치를 총괄하는 김현석 삼성전자 대표는 최근 AI 인재 1000명을 채용하겠다는 목표를 밝히며 “아직 AI 인력이 국내에서 많이 부족하다. 전 세계적으로 인력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지현 jhk85@donga.com · 윤신영 ashill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