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조는 일본의 침략을 내다보지도 못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성과 백성을 버렸으며 전란 뒤에도 국가 재건에 실패한 왕으로 기억된다. 사극에 등장할 때도 대체로 전란과 당쟁 속에서 허둥대는 무능한 군주로 묘사된다. 하지만 어릴 때 신동이란 소리를 들었고 전쟁을 치르면서도 하루라도 서책을 가까이 하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로 학문이 깊었으며 그림, 글씨에 조예가 깊었다는 평가도 있다. 선조는 과연 어떤 임금이었을까?
선조의 글씨는 속도가 매우 빠르다. 이를 보면 머리의 회전이나 판단이 빠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글씨가 매우 균일하고 정돈되어 있고 빈틈이 없어서 논리적이며 검소했다는 평가가 맞는 것으로 보인다. 세로선이 길고 마무리가 확실한 것을 보면 의지력이 있고 업무 능력이 뛰어났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글자의 간격이 좁은 것은 스스로 판단하고 자의식이 강하며 자기표현과 자기인식에 엄격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이, 이황, 윤두수, 이항복, 이덕형, 유성룡 등 걸출한 인물들이 선조의 면전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고 할 만하다.
하지만 선조는 리더십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반듯한 정사각형을 이루는 글씨는 그가 규정을 매우 중시하고 보수적이었음을 알려준다. 선조의 글씨는 글자를 구성하는 각 부분 사이의 틈이 좁아서 빈틈이 거의 없는 밀폐형이다. 이 점이 선조 글씨의 가장 큰 특징인데 이렇게 공간이 작은 글씨를 쓰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필적학에서는 자신만의 세계에 틀어박혀 마음이 넓지 않고 포용력이 없으며 남의 이야기를 느긋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분석한다. 이런 유형의 인물은 작은 회사의 리더로서도 적합하지 않은데 국가, 특히 큰 위기에 놓인 국가를 경영했으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선조가 국왕이 아닌 신하였다면 좋았을 것이다. 변호사·필적 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