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초기의 일이다. 조선 조정은 왜군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어서 고민했다.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면서도 왜군의 대략적인 병력도 몰랐다.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보면 명나라가 원군을 보내려고 해도 왜군의 세력을 모르니 얼마나 파병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왜군에게 포로로 잡혔던 한 향리가 중요한 정보를 안고 탈출해 왔다. 처세술의 달인이었던 그는 왜군에게 잡힌 뒤 열심히 일을 해 신임을 얻었다. 적군과도 잘 사귄 그는 군량을 담당하는 왜군과 얘기를 나누다가 하루에 소모되는 쌀이 얼마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것을 한 끼 식사분으로 나누면 왜군의 전체 병력이 나왔다.
왜군 장수는 조선 측 사절이 방문했을 때 그를 슬쩍 풀어줬다. 돌아온 그는 조선 정부에 자신이 가지고 온 정보를 보고했다. 선조는 그에게서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얻어내려고 했지만 대신들은 거부했다. 조선의 군법에는 적에게 포로가 된다는 개념이 없었다. 죽지 않고 항복해서 포로가 되는 것은 사형이었다. 대신들은 빨리 그를 죽이자고 난리를 쳤다. 선조가 정보라도 얻은 뒤 죽이자고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그 향리는 신속하게 처형되고 말았다.
왜 이렇게 처형을 서둘렀을까? 국가 존망의 위기에 조정 대신들이 위기감이 부족하거나 나라를 구할 의지가 없거나, 생각이 짧았을 리도 없다.
남은 이유는 하나인데, 그 향리를 빨리 죽이는 것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최선의 수단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군이 적에게 항복하지 못하도록 하고, 항복한 자에게는 용서가 없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그까짓(?) 정보보다 중요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강력한 적군의 위협에 굴복해 투항하는 자가 속출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이해는 간다. 그러나 이런 판단이 현실보다는 이념, 신조, 가치가 먼저라는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었다고 생각하면 오싹하다. 개인의 삶에서야 구차한 현실의 이익보다 가치 추구를 우선하는 것은 나무랄 수도 없고 존경스럽기도 한 부분이다. 그러나 국가 경영은 현실이다. 국제관계와 전쟁은 더더욱 치열한 현실이다. 여기에 가치와 정신만을 내세워서는 책임질 수 없는 고난으로 국가와 백성을 밀어 넣게 된다. 역사학자
이은택 nab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