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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속 항아리에 ‘숨진 남편 피묻은 옷’ 보관..광복뒤 펼쳐놓고 통곡

땅속 항아리에 ‘숨진 남편 피묻은 옷’ 보관..광복뒤 펼쳐놓고 통곡

Posted March. 30, 2019 07:41   

Updated March. 30, 2019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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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년 일제의 칼에 숨진 독립운동가 문용기 선생(1878∼1919·애국장·사진)은 익산 4·4만세운동의 정신적 지주다. 선생이 익산 만세시위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데는 아내 최정자 여사(1887∼1955)의 심모원려(深謀遠慮)가 자리 잡고 있다.

 아침에 나간 선생이 주검으로 돌아오자 그의 노모와 아홉 살 난 딸이 혼절해 그길로 세상을 떠났다. 네 살 난 딸도 병을 앓다가 그해에 죽어 최 여사는 한 해에 네 번의 초상을 치러야만 했다.

 최 여사는 이처럼 황망한 상황에도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그는 남편이 입었던 피 묻은 두루마기와 솜저고리를 항아리에 담아 땅에 묻었다. 언젠가 광복이 되면 일제 만행을 생생하게 증언해줄 증거물이 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나중에 일본군이 찾아와 선생의 유품을 내놓으라고 협박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최 여사는 남편의 혈의(血衣)들이 탈색될 기미를 보이자 항아리에서 꺼내 자신의 한복치마로 싼 뒤 대들보에 정성스럽게 매달아 두기도 했다. 마침내 광복이 되자 최 여사는 비로소 피 묻은 두루마기와 솜저고리를 꺼내 마당에 깔린 멍석 위에 펼쳐 놓고 제를 올린 뒤 아들과 함께 대성통곡을 했다.

 이 혈의는 며느리 정귀례 씨가 1985년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 독립기념관은 이후 4년간 선생의 혈의를 전시하다 1989년부터 보존을 위해 수장고에 보관하고 있다. 현재 독립기념관 제3전시관(겨레의 함성)에서 볼 수 있는 혈의는 복제품이다. 일본 헌병의 대검에 찔려 생긴 저고리 왼쪽 옆구리 부분과 옷깃, 소매의 선혈 흔적들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 일제의 야만적인 탄압 상황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정승호 shj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