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타는 십자가에서 내려진 죽은 예수를 성모 마리아가 무릎 위에 안고 있는 도상을 말한다.
독일 화가 케테 콜비츠가 만든 피에타는 일반적인 피에타상과 달리 성모가 웅크린 채 죽어있는 아들을 뒤에서 감싸 안은 모습이다. 한 손으론 입을 가리고, 다른 한 손으론 죽은 아들의 손을 매만지고 있다. 상실의 고통과 슬픔을 넘어서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어머니의 모습은 보는 이들을 숙연하게 만든다.
이 작품은 전쟁에서 자식을 잃은 화가 자신의 경험에서 나왔다. 프로이센의 중산층 집안 출신인 콜비츠는 24세 때 의사 카를 콜비츠와 결혼하면서 가난한 민중의 삶에 눈뜨게 된다. 남편은 베를린 외곽에 자선병원을 세워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헌신했고, 자신은 이들과 함께 살며 그들의 삶을 화폭에 옮겼다. 독일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을 표현한 판화 연작 ‘직조공의 반란’으로 명성을 얻은 그는 노동, 빈곤, 질병, 죽음, 반전 등을 주제로 한 작품을 발표하면서 부당한 권력에 항거하는 예술가의 표상이 됐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큰 시련을 겪었다. 둘째 아들 페터가 전사했기 때문이다. 나중엔 손자 페터도 2차대전에 참전해 목숨을 잃었다.
아들을 잃은 엄마는 전사가 됐다.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작품들을 통해 실천하는 예술가로 거듭났다. 나치 정권이 그의 전시를 금했던 시기에 오히려 반전 메시지를 전하는 피에타를 만들어 전쟁으로 자식을 잃은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부르주아 지식인으로 살 수도 있었지만 평생을 가난하고 소외된 약자 편에 서서 그들을 옹호했던 콜비츠는 1945년 4월 22일에 세상을 떠났다. 전쟁이 끝나기 불과 16일 전이었다.
1993년 독일 정부는 전쟁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기념관인 베를린 ‘노이에바헤’를 재개관하면서 콜비츠의 피에타를 확대 복제해 영구 설치했다. 조각 앞에는 ‘전쟁과 폭정의 희생자들’이라는 문구가 크게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