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수령 동지의 심장 고동이 멈췄다.” 1994년 7월9일 낮 12시. 북한 중대 발표의 첫 머리는 이렇게 시작했다. 김일성 사망 시점은 전날 오전 2시경이었다. 하지만 수령의 ‘영생불사’를 믿었던 북한 주민들은 이 보도가 믿기지 않았다. 당시 북한에 살았던 한 탈북자는 아들이 김일성 사망 소식을 전하자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한다”고 아들을 때렸다고 했다.
▷김일성은 김영삼(YS) 대통령과의 첫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다가 심근 경색에 심장 쇼크가 겹쳐 사망했다는 게 공식 발표였다. 김일성은 YS의 평양방문 후 자신이 서울을 답방할 경우에 대비해 “백두산의 김일성이 왔습니다”로 시작하는 연설 원고까지 써놓았다. 이 자필연설 원고는 금수산 기념궁전에 공개 전시되기도 했다.
▷하지만 김일성-김정일 부자간 권력투쟁이 빚은 죽음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김정일이 권력 강화를 위해 아버지가 주도하는 남북정상회담에 반대하자 충격을 받은 김일성이 급사했다는 것이다. 북한이 세계인의 존경을 받는다고 자랑해온 김일성 장례에 외국 조문사절을 받지 않겠다고 한 것도 이런 의혹을 부추겼다.
▷김일성 사망 이후 북한에선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 굶어죽은 주민이 200“30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100년만의 장마 등 자연재해가 원인으로 꼽혔지만 김씨왕조 체제의 한계 때문이라고 보는 분석이 많다. 그래서 지금도 북한에선 “김일성 때는 그나마 먹고 살았다”는 소리가 나온다고 한다.
▷손자 김정은이 외모와 언행에서 김일성 흉내내기를 자꾸 하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작년 8월 김정은이 인민복 상의를 벗고 반팔 속옷 차림으로 현지 시찰을 하는 모습이 보도됐다. 북한 기록영화에는 김일성도 속옷 차림으로 현지 지도하는 장면이 종종 나왔다. 김정은은 손바닥을 엇갈리게 해서 박수를 치거나, 옆머리를 짧게 친 모습 등은 김일성 향수를 자극한다. 소련의 위세를 등에 업고 권력을 장악해 남북분단과 6·25를 일으킨 전쟁범죄 책임자지만 워낙 생전에 우상화 작업에 열을 올린 결과 여전히 북한에선 김일성 후광이 먹혀든다는 것이다.
▷김정은이 집권 후 김일성 사망 중앙추모대회에 참석한 것은 2014년 20주기 행사 때 뿐이었다. 각종 기념일의 정주년(0이나 5로 꺾어지는 해)에는 행사규모가 커지는 만큼 이번 25주기엔 김정은이 참석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하노이 핵 담판 결렬로 체면을 구긴 김정은이 다시 미국과 담판에 나서기 위해선 조부의 아우라가 필요할 것이다.
정 연 욱 jyw1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