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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다고 사람 내보내면 안 된다”

Posted March. 30, 2020 07:41   

Updated March. 30, 2020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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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가 나를 포함한 고교 동창들과 연락을 끊은 지 수년째다. 몇몇 친구들에게 생활비를 빌렸던 게 이유였다고들 한다. 빌려준 쪽에선 없는 셈 치면 될 금액이었지만, 빌린 쪽에선 빚을 못 갚는 자괴감에 몸을 숨겼을 게다. 가끔 Y가 대학 시절 어학연수 1년에 휴학 1년을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랬으면 외환위기 이듬해에 대학을 졸업해 그 살벌했던 취업시장에서 길을 잃지 않았어도 됐고, 직장을 못 구해 부모님 돈까지 끌어내 자영업을 시작하지 않았어도 됐고, 가게를 접고 다시 구직시장에 나섰을 때 나이 때문에 원서조차 못 내는 상황에 처하지 않았어도 됐고, 변변한 경력이 없는 탓에 줄곧 변변치 않은 직장을 전전하다 금융위기로 그마저도 어려워지자 생활고에 시달리지 않았어도 될 일이었다.

 Y는 그냥 때를 잘못 만난 것뿐이었다. 세대마다 간난신고가 있겠지만 사회생활의 출발을 위기와 함께 시작했던 40, 50대에는 유독 수많은 Y가 있다.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끊겼다고들 하지만 위기가 오면 계층 유지의 난간마저 무너져 내린다. 40대는 이미 작년부터 일자리에서 가장 많이 밀려나는 연령대가 돼 있다. 한번 밀려나면 계속해서 주변인으로 남게 되고 그 상흔은 다음 세대로 대물림되는 걸 두 번의 위기를 통해 봐 왔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의 말처럼 이번 위기는 우리 세대가 겪는 가장 큰 위기일 수 있고, 검증되지 않고 위험하기까지 한 응급 처방들은 폭풍이 지나간 뒤 새로운 표준이 돼 전혀 다른 세상을 만들어 낼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아시아 기업들의 경쟁 범위가 자의에 의해서건 타의에 의해서건 개별 국가에서 세계로 확장됐고, 근로자의 고용 형태가 다양한 비정규직까지 포함하게 됐듯 말이다. 코로나19 이후 산업계에선 대규모 재택근무가 도입되고, 교육계에선 학교 공동체에서 체험적으로 습득해야 할 비교과적 경험들이 생략된 원격교육 도입이 거론되고 있다. 이런 식의 ‘비대면 실험’들은 위기가 끝난 뒤 새로운 발전을 유인해낼 수 있는 불씨가 될 수 있지만, 어쩌면 노동 수요를 줄이는 실험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는 느낌도 갖게 한다.

 고용시장은 더 유연해야 하고, 신기술의 도입은 더 빨라야 하며, 기업은 더 경쟁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를 위해선 사회의 수용성을 높이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 체력이 너무 떨어진 환자는 수술대에 올리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2008년 금융위기 때 구본무 당시 LG그룹 회장은 “어렵다고 사람을 내보내면 안 된다”고 계열사에 당부했다. “그래야 나중에 성장의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모든 변화와 혁신의 중심은 우리 구성원들이다”라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이 발언은 실직의 공포가 엄습한 한국 사회에 큰 위로가 됐다. 구 회장의 발언에서 경영인의 문법을 걷어내 보면 공동체 일원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으로 읽혀서다.

 이번 위기도 Y 같은 먹잇감을 찾아다닐 것이다. 구 회장이 그랬던 것처럼 공동체를 살리기 위한 모두의 힘이 필요한 때다. 기업은 가급적 고용을 유지하고, 근로자는 다른 사람의 고용을 위해서라도 자신의 권리를 조금씩 양보했으면 한다. 정부도 이럴 때 기업 규제와 노동 규제를 풀어줘야 한다. 정 못 하겠으면 한시적으로라도 완화해줘야 한다. 재정만으로 버틸 수 있는 시기가 아니다. 마침 삼성과 현대차가 신입 공채를 시작하거나 재개한다고 한다. 다행이고 고맙다. 이런 노력과 참여가 쌓여 이번에는 과거 두 번의 위기 때처럼 제발 속절없이 쓰러지지 않기를 기원한다.


고기정기자 ko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