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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이 지옥이다

Posted May. 08, 2020 07:36   

Updated May. 08, 2020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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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요즘 새벽 2시 반에 자고 오전 7시에 일어납니다. 잠을 뒤로한 채 성공을 위해 일로매진하느냐고요? 그럴 리가요. 아파트 층간소음 때문입니다. 윗집에 얼마 전 여중생 가족이 이사를 왔습니다. 제가 판단할 땐 좀 미친 아이 같습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새벽 1시 넘어 비명을 질러대다가 얼마 전엔 대문을 열고 뛰쳐나와 계단에서까지 비명을 질러 앞집, 아랫집, 윗집을 식겁하게 만들고 공동체의 더불어 사는 삶에 균열을 일으켰습니다. 우울증과 히스테리, 과잉행동장애를 앓는 것 같은데, 어머니는 상담치료를 받게 하기는커녕 매일 밤 10시까지 아이를 학원에 처넣습니다. 스트레스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소녀는 대입 재수에 실패한 언니와 조석으로 싸우는데, ‘저러다 둘 중 하나가 죽지 않을까?’ 하는 수준으로 악다구니를 하고 싸웁니다. 결국 그 아버지가 치유라도 될까 하여 강아지를 사줬는데, 이 멍멍이의 유전자에 깃든 늑대의 영혼이 소녀의 심신불안과 시너지를 내면서 소녀는 더 날뛰고 있습니다. 새벽까지 쿵쿵거리며 넓지도 않은 집을 뛰어다니는 소녀는 가끔씩 ‘드르륵’ 드릴을 돌리는 듯한 기계소리마저 새벽에 내는데, 노이로제에 걸린 저는 ‘혹시 개를 잡아 죽이는 게 아닌가’ 하는 미친 상상도 하게 됐습니다. 참다못해 얼마 전 강력히 항의하러 윗집을 찾아 올라갔다 깜짝 놀랐습니다. 대문을 열고 나온 어머니가 울면서 “아이가 제 힘으론 컨트롤이 안 돼요”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소녀보다 더 우울한 어머니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그 집 거실은 가구 하나 없이 텅 빈 것이 마치 소형 운동장 같았습니다. 친구 하나 없는 아이가 대인기피증에다 외출도 혐오하며 히키코모리처럼 집에만 틀어박혀 있다 보니, 개랑 뛰어다니라고 아예 운동장처럼 마련해준 것이었습니다. 이 소녀의 광기는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극단으로 치달았는데, 등교 개학을 앞둔 요즘엔 놀랍게도 그 수위가 낮아진 게 아니라 가일층 높아졌습니다. 새 학년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나는 게 무섭고 불안하기 때문이겠지요. 저는 그날 소녀 어머니의 참담한 표정을 목격한 뒤 지옥 같은 층간소음을 인내하며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철인 2종 경기를 묵묵히 해내고 있습니다. 언젠간 윗집이 망하거나 흥해서 이사를 갈 광복의 그날을 기다리면서 이것이 언필칭 묵언수행이고, 불쌍한 이웃에게 행하는 정신적 기부행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개인적인 하소연을 영화칼럼에 늘어놓느냐고요? 사회적 거리 두기가 생활 속 거리 두기로 전환되면서 많은 청소년이 등교를 앞둔 흥분과 기대에 휩싸여 있지만, 이런 기쁨이 윗집 소녀에겐 서슬 퍼런 공포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입니다. 이렇듯 공포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관점에 따라 자못 창조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요즘 인기라고 하는 드라마 ‘부부의 세계’만 봐도 그렇습니다. 주인공 김희애는 필라테스 강사와 바람이 난 남편과 이혼했는데, 필라테스 강사와 재혼한 전 남편에게 미련을 못 버린 김희애가 전 남편과 격렬하게 합방하는 장면을 보고 있자니 수비수였다가 공격수로도 변신하는 올라운드 플레이어를 목격하는 듯한 정신적 아노미에 휩싸였습니다. 부부관계든 연인관계든 남녀 간 맺는 인연 자체가 업(業)이자 원죄이자 공포라는 게 드라마의 메시지인 것 같았거든요. 영화도 마찬가집니다. 제가 본 가장 공포스러운 영화는 봉준호 감독의 ‘마더’(2009년)입니다. 이 영화는 “아, 이 맛이야”라는 조미료 광고 모델로 유명한 ‘어머니’의 상징 김혜자를 캐스팅한 것 자체가 불온합니다. 모성의 상징인 김혜자는 영화 속 아들 원빈이 사람을 죽이고 다녀도 “아이고, 예쁜 내 새끼”하며 사랑을 퍼붓습니다. 봉준호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김혜자의 행동거지를 통해 동서고금 인류가 신화화해 온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근원적이고도 도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모성은 진짜로 위대할까, 진영논리는 명함도 못 내밀 만큼 그 어떤 이성(理性)도 도덕도 법도 논리도 설득도 통하지 않는 동물적 광기(狂氣)야말로 모성의 본질이 아닐까 하는 질문 말입니다. 샌드라 불럭 주연의 넷플릭스 영화 ‘버드 박스’(2018년)도 색다르고 체감적인 공포를 경험하게 해줍니다. 이 영화는 루마니아에서 시작된 정체불명의 전염병이 세계적 팬데믹을 이루는 지옥도를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북한이나 이란이 벌인 세균전으로 의심하지만, 이 전염병은 바이러스가 아닌 ‘시각’에서 비롯된다는 기이한 사실이 밝혀집니다. 하늘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무언가를 쳐다보기만 하면 끓어오르는 자살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던지는 사람들의 집단 자살 현장이 끔찍하게 전시되지요. 이 무언가의 정체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지만, 결국 주인공 샌드라 불럭은 자녀와 함께 눈을 가리고 오직 청각에 의존한 채 청정지역을 향해 위험한 길을 떠납니다. 눈으로 보면 죽는다니! ‘n번방’ 사태에서 보듯 암 덩어리 같은 동영상에 ‘감염’되어 제 영혼을 사멸해 버리는 현대인의 시각 중독을 공포로 은유한 발상이 돋보이지요. 알고 보면, 공포는 지금입니다. 이 순간입니다. 제가 이 길고 지루한 글에서 ‘줄바꾸기’를 하나도 하지 않고 모든 문장을 다닥다닥 붙여 쓴 것도 독자 여러분의 폐소공포를 유발하기 위한 작전이었거든요. 코로나19의 공포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큰 공포인 윗집 소녀가 확실히 일깨워주는 것 같습니다. 타인이 지옥임을.

영화 칼럼니스트·동아이지에듀 상무


이승재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