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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5일 아침

Posted June. 23, 2020 07:33   

Updated June. 23, 2020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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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전쟁 발발 직전, 한국군 병력은 8개 사단, 약 9만5000명이었으며 38선에는 4개 사단이 배치되어 있었다. 북한군은 10개 사단, 17만5000명으로 8만 명 정도가 많았다. 38선의 병력 차는 더 심해서 7개 사단과 전차여단이 배치되어 있었다. 남북한의 전력 차를 말할 때 북한군에는 242대, 한국군에는 단 한 대도 없었던 전차를 예로 들곤 하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했던 것이 포병 화력이다. 현대전에서 야포의 결정력은 일반인들이 상상하는 이상이다. 포병 화력은 거의 6배 차이가 났다.

 당일에는 더 이상한 일들이 발생한다. 북한군 대부대가 38선에 집결하고 전쟁 준비에 돌입했는데, 이상 징후를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다. 첩보가 올라갔지만 강력한 첩보대를 편성해서 확인하라는 응답이 왔다. 그 첩보대가 정찰을 나갔다가 남침을 시작한 북한군 주력과 조우했다. 국군도 이상 징후를 눈치 채고 한 달 내내 비상경계령을 내리고 있었는데, 6월 23일 경계령을 해제했다. 그동안 고생했다는 이유로 병력의 절반을 외출 외박으로 풀었다. 24일 사단장들은 육군 장교구락부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와 있었다. 이건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대략 한 달 전 주요 지휘관들이 교체됐던 일은 모르는 분이 많다. 지휘관 교체야 정기 인사라고 해도 한 번에 교체를 해서는 안 된다. 거의 모든 지휘관들이 현장 파악이나 부대 파악도 되지 않은 상태였다.

 객관적 전력이 절반도 안 되는 상황에서 방어계획은 현실성을 결여하고 있었다. 사단의 연대들은 비효율적으로 배치되어 있었고, 백선엽 장군의 증언에 의하면 2, 3선 방어선도 수립되어 있지 않았다. ‘한 치의 땅도 적에게 줄 수 없다’는 명분론 탓이었다. 전력이 우세하더라도 상대 준비가 탄탄해서 압도적 승리를 확신하지 않으면 전쟁은 여간해서 발발하지 않는다. 반대로 전력이 우세해도 전술적 대응 준비가 잘못되어 있고, 전쟁 준비가 엉성하면 전쟁은 발생한다. 6·25전쟁의 참교훈은 이것이 아닐까?


김성경기자 tjdrud0306@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