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누군가를 애도하는 것은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이다. 문학이 애도에 유독 민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젊은 작가들의 작품도 예외가 아니다. 김화진 작가의 단편소설 ‘사랑의 신’도 그러하다.
소설의 화자는 불어난 계곡물에 뛰어들었다가 죽은 동생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여성이다. 그는 시간이 꽤 흘렀어도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동생을 대한다. 장마철인데 계곡물에 들어가다니 왜 그렇게 과신과 과시가 심한 거니. 그렇게 윽박지름으로써 동생을 죽음 이전의 상태로 돌려놓으려는 것이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동생이 아직 살아 있다.
이러한 심리를 더 잘 보여주는 게 ‘공룡시대’라는 만화영화에 대한 화자의 반응이다. 엄마공룡은 육식공룡과 싸우다 죽어가면서 아기공룡 리틀풋에게 말한다. “곁엔 없지만 항상 너와 함께일 거야.” 죽어도 너의 마음속에 살아 있을 테니 죽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보통 우리는 이러한 식으로 애도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슬퍼하다가 결국에는 그의 부재를 기억과 추억으로 대체한다. 이게 애도의 상식이다. 그런데 화자에겐 그렇게 살아 있는 건 살아 있는 게 아니다.
화자는 자신의 만화 속에 동생을 실제와 다르게 그려 넣는다. 만화에서는 동생이 무모하지 않고 오히려 겁쟁이다. 그러니 물에 빠져 죽을 리가 없다. 동생이 죽은 후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도 만화에서는 화목하게 같이 산다. 걸핏하면 폭력적이던 아버지는 울보로, 무기력하고 무관심하고 신경질적이던 어머니는 괴력의 소유자로 그려진다. 이처럼 상상 속으로 도피하는 걸 보면 화자는 상식적인 의미의 애도에 실패한 사람이다. 그러나 역설적인 의미에서, 애도하지 않으려는 것도 애도의 한 방식이다. 부재하는 사람을 살려내려는 허망한 몸짓보다 더 진실한 애도의 정신은 없을 테니까.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말처럼 애도의 실패가 애도의 성공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말처럼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애도는 저절로 끝난다.” 언젠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