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봄나들이 나온 시인에게 강남의 봄 풍광은 경이롭기 그지없다. 바다 위로 번지는 서광에 구름과 노을빛이 찬란하고 매화와 버들은 강안 양쪽에서 시나브로 봄기운을 발산하고 있다. 잦아진 꾀꼬리의 울음도 강 위에 뜬 물풀의 푸름도 화사한 봄빛 세례를 즐기고 있다. 이렇듯 이채로운 강남 풍광은 북방 출신 시인에겐 덤덤하게 지나칠 수 없는 경이였으리라. 친구가 먼저 경탄을 쏟아내며 시 한 수를 읊조린다. 하지만 옛 가락에 실린 친구의 노래는 그예 봄 풍광에 심취한 시인의 눈물샘을 건드리고 만다. 경탄이 슬픔으로 급전직하하면서 시인은 문득 어디로 돌아가고픈 생각을 했을까. 객지 풍광에 고향이 떠올랐거나 지방 관리로서 장안 조정으로의 귀환을 염원했을지도 모른다.
두심언은 손자 두보의 시명 덕에 유명세가 따르기도 하지만 그 자신 역시 당대 5·7언 율시의 토대를 다졌다는 찬사를 얻을 만큼 시재가 특출했다. 미관말직으로 20년 가까이 지방관을 전전하다 무측천(武則天)의 인정을 받아 조정으로 복귀했다. 두보가 ‘시는 우리 집안의 사업’이라고 자부한 근거이기도 하다. 아쉽게도 두심언에게는 기질이 오만하고 경박하다는 일화가 여럿 뒤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