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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 없는 전쟁

Posted June. 29, 2021 07:21   

Updated June. 29, 2021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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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6월 25일 아침. 이때만 해도 개성은 대한민국의 땅이었다. 개성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는 1사단 12연대였다. 개전과 함께 가장 먼저 공격을 받은 도시가 개성이었다. 북한군 1사단과 6사단이 개성 방면 공격을 맡았고, 개성 시내로 진군을 시도한 부대는 6사단이었다. 북한군 6사단은 미군과 한국군 지휘관이 6·25전쟁 중 가장 유능했다고 인정한 북한군 부대였다.

 6사단 선두 부대가 개성으로 근접해 오자 송악산 자락에서 최초의 교전이 벌어졌다. 당시 12연대는 다른 부대와 마찬가지로 3분의 1의 장병이 휴가로 부대를 비운 상태였다. 당시 국군이 정상적인 상태였다고 하더라도 병력 부족으로 방어전면이 너무 넓었다. 자연히 방어력이 허술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취약한 전선에 전차까지 앞세운 북한군 최정예 사단이 엄습했으니 국군이 제대로 저항하기 힘들었다. 북한군이 침공을 시작했다는 보고가 서울에 도착했을 때, 벌써 사령부에서는 개성이 함락당했을 것으로 판단했을 정도였다.

 전투력에서 앞도적인 열세였지만 순식간에 벌어진 개성 함락에는 다른 비사가 있다. 전날 북한군 부대가 국군으로 위장해 이미 개성 시내에 잠입해 있었다. 그들은 개성 시내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야영하고, 새벽에 시내 진입을 시도했다. 침공이 시작되자마자 개성역에 북에서 온 열차가 도착했는데 당시 역으로 왔던 미군 고문관이 보니 열차에서 완전무장한 북한군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12연대가 섬멸당하지 않고, 일부라도 개성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 기적이었다. 그러나 그날 개성의 12연대가 완전 편제 상태로 단단히 대비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개성 함락 시간을 늦출 수는 없었을 것이다.

 병력, 무기, 군사비. 이런 수치는 말 그대로 참고용 숫자일 뿐이다. 전쟁이 숫자로 결정되었다면 전쟁사란 과목이 존재할 필요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