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경기가 제 국가대표 마지막 경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마스크를 쓴 채 차분한 목소리로 답하던 한국 여자 배구 대표팀 주장 김연경(33)은 이 얘기를 꺼내는 동안 두 차례나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고교 2학년이던 2004년 이후 17년 동안 왼쪽 가슴에서 내려놓은 적이 없던 태극마크와 작별인사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 치열한 승부의 세계 속에서도 늘 여유를 잃는 법이 없었던 김연경은 이날 “머릿속이 하얗다. 아무 생각이 안 난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카메라 앞에선 떨리는 목소리로 연신 눈시울을 훔쳤다.
1976 몬트리올 올림픽 동메달 이후 45년 만에 올림픽 메달을 노렸던 한국 여자 배구(세계랭킹 11위)는 다음을 기약하게 됐다. 8일 일본 도쿄 아리아케 아레나에서 열린 2020 도쿄 올림픽 세르비아(세계 6위)와의 동메달결정전에서 0-3(18-25, 15-25, 15-25)으로 패했다.
시상대에 서진 못했지만 이번 대회 대표팀의 활약은 눈부셨다. 8강에서 세계랭킹 4위 터키를 무너뜨리는 이변을 쓰고 9년 만에 4강 무대에 올랐다. 한일전에서는 5세트 12-14를 뒤집는 대역전극도 썼다. “도쿄에 최대한 오래 남겠다”는 김연경의 각오대로 폐회식이 열리는 8일까지 경기를 치르며 여자 배구는 한국 선수단의 활력소 역할을 했다. “여자 배구의 좋은 기운을 받아 좋은 경기를 했다”는 선수도 많았다.
마지막 올림픽을 향한 김연경의 투혼도 빛났다. 3회 연속 올림픽 본선에 나선 김연경은 이번 대회 득점(136점), 디그(83개) 전체 2위로 팀의 기둥 역할을 했다. 승리를 위해 뛰어서 때리고, 날려서 공을 건졌다. 주장으로 정신적 지주 역할도 했다. 경기 뒤 김연경은 “충분히 웃을 자격이 있는 만큼 선수들에게 웃으라고 했다. 누구도 기대하지 않은 결과다. (올림픽 4강에) 올 수 있어서 너무 기쁘다”고 말했다.
김연경은 이번 대회 내내 통증에 시달렸다. 2005년 프로 데뷔 후 함께해 온 이상화 트레이너는 “(테이핑을 했다 떼면서 생긴) 피멍 흔적보다 사실 오른쪽 무릎에 테이핑을 감았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평소 시즌 중에도 테이핑을 하는 일이 없는 선수라 놀라서 전화를 해봤더니 무릎이 흔들리는지 통증이 꽤 있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허벅지 위 피멍이 이슈가 되자 이를 가리려는 듯 다음 경기 오히려 더 테이핑을 길게 감고 나오기도 했다. 김연경은 귀국 뒤 상태를 점검할 계획이다.
“어쩌겠어요. 참고 뛰어야지”란 말로 스스로를 달랜 건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서였다. 정들었던 태극마크를 내려놓게 된 김연경은 “너무나도 많은 관심 속에서 올림픽을 치렀다. 여자 배구를 알려 기분이 좋다. 정말 꿈같은 시간을 보낸 것 같다. 후배들이 잘 이어갔으면 좋겠다”란 말로 작별인사를 했다. 이날로 한국 팀과 계약이 종료된 스테파노 라바리니 감독(42)은 “김연경과 함께하면서 나는 그가 왜 배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인지를 이해했다. 위대한 인물이자 리더로서 김연경이 가진 카리스마에 대한 기억을 안고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강홍구 windu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