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무장 반군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 장악이 예상보다 일찍 현실화될 수 있다는 전망이 미 정부 관리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 미군 철수 이후 탈레반의 세력 확장은 예견된 일이지만 그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조 바이든 행정부의 아프간 출구 전략이 다소 성급했던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워싱턴포스트(WP)는 11일 한 당국자를 인용해 아프간 수도 카불이 90일 이내에 탈레반의 수중에 들어갈 수 있다고 보도했다. 또 다른 당국자들은 수도 함락이 한 달 이내에 일어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당초 미 정보당국은 카불 함락이 6∼12개월 이내에 벌어질 것으로 예상했지만 탈레반의 공세에 아프간 정부군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있다. CNN방송은 이날 행정부 당국자들을 인용해 카불이 30∼60일 안에 함락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12일 AFP통신에 따르면 탈레반은 이날 수도 카불에서 약 150km 거리에 있는 가즈니주의 주도 가즈니를 함락했다. 아프간 전국의 주도 34개 중 10개를 장악한 탈레반은 전 국토의 65%를 점령한 상태다.
아프간 정부는 카불을 포함한 대도시 위주로 정부군을 투입해 방어에 나서고 있지만 이렇다 할 교전도 없이 무력하게 밀리고 있다. WP에 따르면 11일 오전 쿤두즈주 공항에 있는 217부대의 수백 명에 달하는 정부군은 미국이 준 무기와 함께 탈레반에 항복했다. 한 아프간 정부 관계자는 “아무도 싸우려 하지 않았다”고 WP에 전했다. CNN은 탈레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아예 군복을 벗고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는 사례도 아프간 정부군 사이에서 목격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상황이 급속히 악화되자 아슈라프 가니 아프간 대통령은 전날 북부 최대 도시 중 한 곳인 마자르이샤리프를 직접 찾아 방어 태세를 점검했다. 탈레반을 피해 수만 명의 피란민이 발생한 가운데 정부 고위 관료들도 아프간을 떠나고 있다. 칼리드 파옌다 아프간 재무장관 대행은 사임하고 해외에서 투병 중인 아내와 머물기 위해 출국했다.
탈레반 점령지에서는 강제 결혼, 강제 징집 등이 벌어지면서 아프간 국민들의 삶은 급속도로 피폐해지고 있다. 탈레반은 전투원 확보를 위해 젊은이들을 강제로 징집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AFP통신에 따르면 수많은 피란민들이 수도 카불로 몰려들고 있다.
아프간의 상황이 최악으로 가고 있지만 바이든 행정부는 8월 말까지 미군을 전부 철수시키겠다는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전날 이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이 이어지자 “철수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면서 “우리는 그곳에서 수천 명을 잃었다. 그들(아프간)이 자신을 위해, 그들의 국가를 위해 스스로 싸워야 한다”고 촉구했다.
일각에선 이런 미국의 태도는 또 다른 ‘실패 국가’의 탄생을 손놓고 지켜보는 무책임한 결정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2011년 미군이 이라크에서 철수했다가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가 발호한 것과 비슷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공화당의 벤 새스 상원의원(네브래스카주)은 성명에서 “우리가 아프간을 포기한 이상 탈레반이 승리해 여성들을 짐승처럼 다루고 테러리스트에게 피난처를 제공해도 놀라워해선 안 된다”고 비판했다.
유재동 jarret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