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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잉의 윤리

Posted December. 22, 2021 07:42   

Updated December. 22, 2021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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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굳이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음 직한 돌아온 탕자 이야기.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재산을 달라고 하더니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알거지가 되어 나타났다. 해진 옷과 찢어진 신발에 피골이 상접한 얼굴을 하고서. 그러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 마음을 표현한 단어가 ‘에스플랑크니스테(esplanchnisthe)’라는 그리스어다. 한글 성경을 비롯한 대부분의 성경은 이 말을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로 옮기고 있지만 아버지가 아들을 보면서 느끼는 격렬하고 충동적인 마음 상태를 표현하기에는 어쩐지 불충분해 보인다.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에 따르면 이 단어는 직역하면 ‘내장을 꺼내다’ 혹은 ‘내장을 삼키다’라는 의미다. 내장이 요동치는 것과 같은 격렬한 육체적 반응이 곁들여지는 감정이라는 의미다. 아들이 속죄하고 안 하고는 중요한 게 아니다. 착실한 큰아들과의 형평성도 중요한 게 아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자마자 창자가 밖으로 나올 것만 같은 감정에 휩싸여 아들을 껴안는다. 렘브란트는 그 장면을 상상하며 ‘돌아온 탕자’를 그렸다. 아버지의 얼굴과 아들의 남루한 뒷모습을 부각시키며.

 예수가 들려준 이 우화의 핵심은 그리스어 단어가 환기하는 감정에 있다. 우화 속의 아버지가 아들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배 속이 요동칠 정도로 엄청난 감정이다. 측은함이나 연민, 사랑이라는 말마저도 세속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언어의 한계를 넘어선 과잉된 감정, 감정의 과잉이랄까. 차가운 머리가 아니라 따뜻한 가슴, 아니 오장육부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원초적인 감정이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런데 탕자 이야기에만 그 단어가 나오는 게 아니다. 아들을 잃고 오열하며 장례를 치르는 과부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예수의 마음을 표현할 때도 복음서는 그 단어를 사용한다. 이보다 더 따뜻하고 강렬하고 가슴 저미는 말이 세상에 또 있을까. 메리 크리스마스.문학평론가·전북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