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읽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는 읽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눈으로 시를 따라가다 보면 이상하게 친숙하다. 어느새 우리 입에서는 어떤 노래가 흘러나온다.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부분에 가서는 분명히 알게 된다. 아, 그 노래로구나 무릎을 치게 된다. 맞다. ‘반달’은 우리 모두가 부를 줄 아는 그 노래 가사다.
동요 가사는 시가 아니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른다. 엄밀히 구분하면 작사(作詞)와 작시(作詩)는 다르다. 오늘날 모든 시가 노래로 불리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크게 생각하면 노래의 언어와 시의 언어는 같다. 먼 옛날에 그 둘은 같은 것이었다. 서양에서도 서정시라는 말은 악기 리라에서 기원했다고 한다. 그 사실을 이제 시는 잊었고, 노래만 기억하고 있다. 예전에 노래가 맴돌면 그의 입에는 시도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읽는 시와 노래하는 시가 분리되면서 우리의 입은 시를 차츰 잊어갔다.
윤극영의 악보집이라는 말도 가능하지만 윤극영의 동시집이라는 말 역시 가능하다. 그는 동요 작사가이면서 동시에 동시 시인이었다. ‘반달’이라는 시를 노래로 불러보면 금방 동의할 수 있다. 음정도 음정이지만 저 노랫말은 우리를 그립고 먼 나라로 데려다준다. 보지 못한 장면을 보게 하고 꿈꾸지 못한 꿈을 꾸게 한다. 그러니 달이 뜨기 기다렸다 이 노래를 불러보자. 나, 노래, 시, 이렇게 셋이 함께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