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형적인 포유류 종은 100만 년 정도 존속했다. 그러나 인류는 추상적 사고 능력을 갖고 있기에 미래에 대비할 수 있고, 기존 종의 한계를 넘어설 수도 있다. 태양은 앞으로 50억 년 동안 타오를 것이고, 태양계는 그보다 훨씬 전에 생명이 살 수 없는 곳이 되겠지만 인류가 다른 별로 이주할 수 있다면 까마득히 먼 미래까지 존속하지 말란 법도 없다.
발전, 정체, 퇴보 또는 소멸. 인류의 미래는 이 가운데 어떤 궤적을 그릴 것인가. 서산대사는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도 어지럽게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된다”고 했다. 영국 옥스퍼드대 철학과 교수인 저자는 이 같은 가르침처럼 장기적 미래에 긍정적 영향을 주는 것이 우리 시대에 도덕적으로 가장 우선해야 하는 일이라는 이른바 ‘장기주의’를 설파한다.
저자는 미래는 필연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소수의 행동이 장기적 차이를 만들 수 있다. 오늘날 노예제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죄악이라고 생각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호모사피엔스의 등장 이후 인간의 10%는 노예였다. 이를 깨뜨린 건 우발적 변화였다. 18세기와 19세기 초 일부 퀘이커교도의 운동이 노예제 철폐의 방아쇠를 당겼다는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노예제가 체제에 이익이 됐지만 가치관의 변화는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전혀 다른 운명을 이끌어냈다.
책은 기후변화나 핵전쟁으로 인한 문명의 붕괴, 유전자 조작 병원체로 인한 인류의 멸종, 발전 속도의 정체 등 여러 시나리오를 그리면서 인류가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나쁜 시나리오가 펼쳐질 가능성은? 생각보다 크다. 기술 발전이 지속된다면 이론적으로는 집에서도 바이러스를 설계하고 생산하는 일이 가능해질 수 있다. 이번 세기에 멸종 수준의 전염병이 발생할 확률을 1% 정도로 보기도 한다.
저자는 행동의 결과를 체계적으로 분석해야 한다는 ‘효율적 이타주의’를 정립해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그는 지금의 세계를 ‘녹은 유리’ 상태에 비유한다. 아직은 뜨거워서 다양하게 변형할 수 있는 굳기 전의 유리처럼 단일한 가치관이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는 얘기다. 유리가 일단 굳으면 깨지느냐 마느냐만 남는다. 앞으로도 오래 지속될 세계의 운명이 당신의 손에 달려 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