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이던 그는 고양이를 담은 바구니를 안고 아버지가 모는 자전거 뒤에 타고 있었다. 그들은 2km쯤 떨어진 해변에 고양이를 버리러 가는 길이었다. 20세기 중반에는 고양이 유기가 그다지 비난받을 만한 일이 아니었다. 버린 이유는 모른다. 집에 들어와 사는 암고양이의 배가 불러오자 새끼들까지 키워야 하는 게 부담이 되어서였을까. 여하튼 그들은 고양이를 버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해변에 버린 고양이가 그들을 반갑게 맞았다. 고양이가 자전거로 돌아온 그들보다 먼저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리둥절했던 표정은 곧 감탄스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뀌고 나중에는 안도하는 듯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고양이는 이후로 집에서 살게 되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버지를 회상하며 쓴 ‘고양이를 버리다’의 서두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의 집에는 고양이가 늘 있었다. 형제가 없던 그에게 고양이는 “소중한 친구”였다.
그는 고양이를 버린 기억을 떠올리다가 아버지도 자기 아버지에게서 버림을 받았다는 얘기를 문득 떠올린다. 버림받은 고양이와 버림받은 아버지. 그의 아버지 세대에는 먹을 것이 충분치 않으면 자식을 양자로 보내거나 절에 맡기는 일이 더러 있었던 모양이다. 할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어떤 절의 동자승으로 보냈다. 그런데 아들은 무슨 이유에선지 얼마 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후로 집에서 살았다. 그러나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았다. 그가 하루키의 아버지다.
안타깝게도 하루키와 아버지의 관계는 순탄치 않았다. 세세하게 얘기하지 않아서 이유를 알 수는 없어도 그는 20여 년을 아버지와 얼굴을 마주치지 않고 살았다. 아픈 기억이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그와 아버지가 고양이를 버리러 갔다가 고양이한테 추월당한 “멋지고 수수께끼 같은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버지를 추억하고 애도하는 작가의 마음이 깊고 애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