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펠리페 4세의 궁정화가였던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평생 인물화를 주로 그렸다. 36세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역사화를 그렸는데, 그 그림이 바로 17세기 가장 중요한 역사화로 손꼽히는 ‘브레다의 항복(1634∼1635·사진)’이다.
그림은 ‘80년 전쟁’으로 불리는 네덜란드 독립전쟁 후반부에 일어난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스페인 군대가 반란을 일으킨 네덜란드 브레다의 군대를 항복시키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1625년 6월 5일, 브레다의 네덜란드 총독 유스티누스 반 나사우는 스페인 장군 암브로지오 스피뇰라에게 도시의 열쇠를 건네며 투항하고 있다. 말이 있는 스페인 군은 병력도 많고 무기들도 멀쩡하다. 반면 패자인 네덜란드 군인들은 피로한 기색이 역력하고 대다수 무기들은 버려지거나 파괴됐다. 화가는 폭력이 난무하는 전쟁 자체가 아니라 화해에 초점을 맞춰 그렸다. 전쟁화인데도 정적이고 낭만적으로 보이는 이유다. 그렇다면 직접 참전하지 않은 화가는 어떻게 특정 장면을 이리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었을까?
벨라스케스는 이탈리아 여행에서 돌아온 직후에 이 그림을 그렸는데, 여행에 동행한 이가 바로 스피뇰라 장군이었다. 그러니까 장군에게 들은 말을 토대로 그린 것이다. 실제로도 스피뇰라는 말에서 내려 패배한 총독을 친절하게 맞이해 포옹했을 뿐 아니라 경례를 하며 오랜 수비의 용기와 인내를 칭찬했다고 한다. 아울러 패배한 네덜란드인을 조롱하거나 학대하는 것을 엄격히 금했다. 스피뇰라가 네덜란드군에 보여준 관용은 화가의 붓을 통해 영원히 화폭에 새겨졌다.
사실 이 그림은 펠리페 4세의 명으로 궁전을 장식하기 위해 그려졌다. 그러니까 스페인의 군사적 성취를 미화하기 위해 제작된 일종의 프로파간다인 셈이다. 화가는 분명 아름다운 화해의 장면을 강조해 그렸지만, 배경에 보이는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불타는 마을이 눈에 밟힌다. 전쟁에서 아름다운 화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 되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