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이집트 수도 카이로의 화상치료 전문 병원 앞을 찾았다. 인근 도로에는 각종 의료 및 구호용품, 식수 등을 담은 대형 트럭 20여 대가 보였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와 접한 이집트 라파 검문소를 통해 가자지구 주민에게 한참 전 전달됐어야 할 물품들이다. 하지만 도로에서 만난 한 운전사는 “이집트 당국이 운송 허가를 내주지 않아 벌써 2주째 이곳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그는 가자지구 사상자가 늘어난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이 물품을 전해 주지 못해 애가 탄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10월 7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으로 발생한 중동전쟁이 14일 100일을 맞는다. 군사력에서 압도적 우위인 이스라엘의 공격이 거듭되면서 가자지구 내 희생자가 속출하고 생존자의 인도주의적 위기 또한 심화하고 있다.
최근 국제사회의 압박으로 이스라엘군이 일부 지상군을 철수시키고 ‘저강도 작전’으로 선회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팔레스타인 민간인 피해는 여전하다. 이스라엘 사망자의 대부분 또한 민간인이고 아직까지 하마스에 인질로 붙잡힌 사람도 100명이 넘는다.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양측 모두에서 민간인 희생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 민간인 피해 속출
가지지구 보건부 등에 따르면 전쟁 발발 후 이달 10일까지 가자지구에서만 최소 2만3200여 명이 숨졌다. 가자 전체 인구(약 227만 명)의 약 1%에 달한다. 특히 사망자 중 70%는 여성, 어린이다.
이와 별도로 최소 50만 명이 심각한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고 유엔은 밝혔다. 이스라엘의 공격이 집중된 가자시티 등 북부 주요 도시에서 파괴된 건물의 비율 또한 80% 이상이다.
최근 가자지구 내부에서는 생필품 부족에 시달리는 일부 주민들이 구호 물품을 두고 탈취 경쟁까지 벌였다. 9일 가자지구 서부 셰이크이즐린에선 수십 명이 구호 트럭 두 대를 포위해 물품들을 탈취했다. AP통신은 “최근 몇 주 동안 벌어진 여러 강탈 사건 중 일부에 불과하다”며 이스라엘의 공습이 집중된 가자지구 북부에는 도로망 등도 대부분 파괴돼 구호품이 도달하기 어렵다고 전했다.
같은 기간 이스라엘 측 사망자도 약 1386명이다. 이 중 약 1200명이 민간인이다. 당초 전쟁 발발 당시 하마스는 약 230명의 이스라엘 민간인을 인질로 잡았다. 이후 100여 명을 석방했지만 아직도 나머지가 인질로 잡혀 있다.
● 확전 우려 고조, 휴전 요원
상황이 이렇지만 양측 모두 쉽사리 휴전에 동의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특히 2일 이스라엘이 레바논 베이루트 인근에 머물던 ‘하마스 3인자’ 살레흐 알 아루리를 사살한 후 양측의 휴전 협상이 완전 중단됐다.
전쟁 전부터 지지율 하락에 시달리던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하마스로부터 선제 공격을 당했다는 오명에서 벗어나고, 지지율을 회복하기 위해 전쟁 발발 후 내내 “하마스 섬멸”만을 외치고 있다. 오사마 함단 하마스 대변인 또한 10일 “이스라엘이 전면 휴전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이스라엘 인질들은 살아서 가족에게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맞섰다.
이번 전쟁이 중동 전체로 확전될 가능성 또한 상당하다. 하마스, 레바논 헤즈볼라, 예멘 후티 등 중동 내 주요 무장세력을 모두 후원하는 이란은 이번 전쟁을 자신들의 중동 내 영향력을 확대하는 계기로 삼으려는 속내를 보인다.
특히 후티는 전 세계의 핵심 교역로인 홍해에서 서구 민간 선박을 잇따라 공격하며 일대의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 후티는 10일에도 홍해를 지나는 미국 선박을 향해 무인기와 미사일을 대거 발사했다.
이스라엘 역시 하마스는 물론 국경을 맞댄 레바논의 헤즈볼라까지 이참에 공격하겠다는 뜻이 확고하다. 요아브 갈란트 이스라엘 국방장관은 7일 “이스라엘은 ‘단일 적’(하마스)이 아닌 ‘축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며 하마스, 헤즈볼라 등과 다면전을 불사할 뜻을 밝혔다.
카이로=김기윤 기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