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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가지로 그린 동그란 고정관념…누구도 벗어나지 못했다

나뭇가지로 그린 동그란 고정관념…누구도 벗어나지 못했다

Posted January. 23, 2024 07:35   

Updated January. 23, 2024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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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녀가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걸어온다. 소녀는 바닥에 놓인 나뭇가지를 집어 원 하나를 그린다. 원은 소녀가 두 팔을 벌리면 꽉 찰 듯 작다. 신문을 읽는 중년 남성, 가방을 든 젊은 여성, 스마트폰을 보는 학생, 웨딩드레스와 턱시도를 차려 입은 신혼부부…. 소녀 뒤를 따라 등장한 사람들은 하나 둘 원 안으로 들어간다. 원은 꽉 찼지만, 사람들은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소녀가 다시 등장해 원을 지운 뒤에야 사람들은 제 갈 길을 간다. 다음 달 15일(현지 시간) 개막하는 제74회 베를린국제영화제 단편 경쟁 부문에 초청된 애니메이션 ‘서클’의 한 장면이다.

‘서클’을 연출한 정유미 감독(42·사진)은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애니메이션으로 네 번이나 초청받았다. 그는 19일 동아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사회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느라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을 그리고 싶었다”며 “고정된 관념의 벽을 벗어나기를 갈망하는 메시지를 간결하게 담아내려고 한 점이 인정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서클’에선 정 감독 특유의 세밀한 연필 드로잉 기법이 돋보인다. 머리에서 갑자기 아이가 튀어나오는 ‘수학시험’(2010년), 사랑하는 남녀의 모습을 그린 ‘연애놀이’(2013년), 집이 허물어지는 모습을 통해 소멸의 의미를 고찰한 ‘존재의 집’(2022년) 등 앞서 베를린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그의 전작들도 모두 흰색의 평면 공간에 채색 없이 검은 선으로만 그려졌다. 그는 “국민대 회화과에서 순수미술을 배우고, 이후 애니메이션에 흥미를 느껴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애니메이션을 시작했다”며 자신의 인생 경로가 작법에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했다.

“대학에 다닐 때부터 서양화보다는 동양화를 좋아했어요. 애니메이션을 배운 뒤에도 여러 색상보다 흑백에 익숙했죠. 동양화 같은 애니메이션이라 신비로운 분위기와 작품의 상징성이 도드라집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애니메이션을 그림책으로 펴낸다. 히로시마 국제애니메이션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받은 ‘나의 작은 인형 상자’(2006년), 한국 애니메이션 최초로 칸 국제영화제 감독 주간에 초청받은 ‘먼지아이’(2009년)는 각각 동명의 그림책으로 출간됐다. 그는 이 두 작품으로 한국 그림책 작가로는 처음으로 아동문학계에서 세계적 권위를 지닌 ‘볼로냐 라가치상’ 대상을 2년 연속(2014, 2015년) 수상했다. 특히 ‘나의 작은 인형 상자’는 라가치상 심사위원회로부터 “시각적 내러티브의 독창적인 구조”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나의 작은 인형 상자’는 소녀가 직접 만든 작은 인형 상자 안을 여행하는 액자식 구조”라며 “애니메이션에서 자주 사용하는 작법이 그림책 분야에선 독특하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대학생 때부터 ‘이나중 탁구부’ 같은 독특한 일본 만화, 꼭두각시 인형을 사용하는 ‘퍼핏 애니메이션’ 등 실험적인 애니메이션을 자주 봤다”며 “내 작품은 주로 ‘내면의 아이’(무의식에 담긴 어린 시절의 기억)를 묘사하고 풀어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양한 시각예술 작품을 보면서 한 장르의 작법을 다른 장르에 적용하는 방식을 즐긴다.

“표현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지 애니메이션과 그림책 모두 여러 장면을 이어붙여 이야기를 담아낸다는 점에서는 같아요. 여러 장르를 옮겨 다니며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이죠.”

‘서클’을 그림책으로도 만날 수 있을까.

“기회가 되면요. ‘서클’은 7분 남짓의 짧은 애니메이션입니다. 그림책으로 만든다면 마치 시 같은 독특한 작품이 되지 않을까요.”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