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 살아 있잖아!”
지난달 10일, 아주대병원에서 만난 이준규 군(14)이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엄마를 위로했다. 준규의 재활치료를 지켜보던 엄마 최윤영 씨는 그 웃음에 또 무너진다. 윤영은 고개를 돌려 눈물을 훔쳤다.
지난해 12월 8일, 준규가 뇌출혈로 쓰러져 구급차에 타고 겪은 228분의 ‘표류’는 준규와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준규는 수술 후 기적적으로 깨어났다. 하지만 계단을 한 층 오르는 것도, 간단한 단어를 기억하는 것도 수술 전과 달리 힘이 든다. 매일 수영을 하고, 엄마를 돕는 의젓한 아이였던 준규가 도로 어린 아이가 됐다. 사고 당일을 기억하지 못 하는 준규는 엄마가 울 때마다 “엄마 왜 울어?” 묻곤 한다.
‘표류’가 끝나더라도 ‘표류’가 남긴 상처는 깊고 아팠다. 왼 다리를 잃은 박종열 씨(40)도 그렇다. 지난해 10월 25일, 378분의 표류 끝에 수술 의사를 만났지만 끝내 다리를 살려내지는 못했다. 그날의 무력했던 기억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종열을 괴롭히고 있다. 행여 아내와 아이들까지 불안하게 할까 울음을 참았던 그는 사고일 이후 딱 한 번, 울었다고 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환자복 차림으로 큰 길가에 나가 펑펑 울었다. 그는 다섯 달이 지난 지금도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를 받고 있다.
골든타임 내에 치료만 받았어도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이다. 더욱이 이런 고통을 겪는 이웃이 얼마나 되는지 아무도 모른다. 준규와 종열은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이 응급의료 현장에서 만난 흔한 ‘표류’ 환자 중 각각 한 명이지만, 정부의 어느 통계도 이들의 규모를 제대로 기록하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에 살지만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것 같았다”고 그날을 회상한 종열은 기자에게 물었다.
“나중에 우리 애들이 다치면 어떡하죠? 저는 그게 걱정돼서 잠이 안 옵니다.”
●표류 그 후
이준규
“엄마, 내 머리가 왜 이리 짧아?”
준규가 눈을 꿈뻑거리며 윤영에게 물었다. 짧게 깎은 머리카락 사이로 바늘 자국이 또렷이 보인다. 이곳을 가르고 두개골을 열고 뇌혈관을 막는 수술을 받는 동안 준규는 사경을 헤맸다. 지난해 12월 8일의 기억이 없는 준규는 거울 속 자기 모습이 낯설 뿐이다.
준규와 달리 윤영은 준규가 쓰러지던 그날의 ‘1분 1초’를 생생하게 기억했다.
“수술 끝났습니다. (아이가) 깨어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어요.”
벌건 눈으로 5시간 내내 수술실 앞을 지키고 있던 윤영에게 의사는 말했다. 이미 사망률이 40%라고 들은 터였다. 뇌혈관이 터진 채 구급차를 타고 병원을 찾아 헤맸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윤영은 빌었다. 뇌가 고장 나 말을 못 해도 좋다, 다른 장애가 생겨도 괜찮다, 어떤 모습으로든 살아만 달라, 엄마 곁에 있어만 주렴. 일주일 만에 상태가 나빠져 수술동의서에 다시 서명할 때도 윤영은 그것만 바랐다. 그게 윤영이 바랄 수 있는 최대의 기적처럼 보였다.
아주대병원에서 수술받은 지 13일 만에 준규는 깨어났다.
준규는 의식을 되찾고도 한동안 엄마를 알아보지 못했다. 말도 잃어버린 채 하루종일 잠만 잤다. 차츰 인지능력을 회복하면서 엄마도 알아보고 친구도 기억했다. 느릿느릿 말을 하기 시작했다. 짧아진 기억력 탓에 물어본 말을 묻고 또 물었지만 윤영은 모든 게 감사하기만 했다.
아주대병원에 간 지 33일 만인 1월 10일, 준규는 경기 화성시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윤영은 준규를 혼자 둘 수 없었다. 준규는 휴대전화를 오래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계단으로 한 층 올라가는 것도 버거워했다. 그런 준규가 윤영은 늘 걱정이었다. 그날처럼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그날처럼 병원이 받아주지 않는다면…. 그날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준규를 옆에 두어야만 한다. 언제든 병원에 데리고 갈 수 있어야 한다.
윤영은 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한동안 준규를 데리고 출근했다. 수술 뒤 어린아이가 된 준규는 출근하는 엄마의 차에 함께 타 천진하게 바깥 구경을 했다. 어느새 엄마의 키를 따라잡은 준규의 걸음걸음이 윤영은 불안하기만 한데 준규는 엄마의 동료들이 건넨 간식을 들고 마냥 신이 났다.
준규가 아무것도 몰라 차라리 다행이었다. 준규는 그날 머리가 아파 학교에 가지 않은 것도, 심장박동이 느려지는데 멈춰 선 구급차에 하릴없이 누워 있었던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윤영은 여전히 그날의 악몽을 꾸지만 준규만 그 고통을 모르면 그걸로 됐다.
박종열
“아빠, 로봇 다리 언제 달 거야?”
휠체어에 매달려 놀던 여섯 살 첫째가 동그란 눈으로 종열에게 물었다. 두 살 둘째는 종열의 품에 안겨 떨어질 줄 모른다. 한쪽 다리를 잃은 채 돌아온 아빠인데도 아이들은 두 달 만에 보는 얼굴이 그저 반갑다. 하루 늦은 크리스마스 선물 같다. 지난해 12월 26일, 경남 김해시에서 혈관이 끊어진 종열이 수술 의사를 찾아 충북 청주시 충북대병원에 간 지 62일 만인 이날, 종열은 김해의 집으로 돌아왔다.
사고를 당한 그날을 종열은 잊지 못한다. 혈관을 잇는 수술이 끝난 건 이튿날 오전 2시. 다리를 절단할 가능성이 90%라 했다. 혈관이 끊어진 채 6시간 넘게 헤맸으니 그럴 수밖에…. 하지만 종열은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혈관이 붙지 않아 이틀간 두 번의 수술을 더 하는 동안에도 10%의 가능성을 굳게 믿었다.
충북대병원 도착하고 나흘째 되던 날, 네 번째 수술에서 그는 왼 다리를 절단했다.
수술을 받고 퇴원한 종열은 경남 창원시 근로복지공단 창원병원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절단 부위 상처가 아물길 기다려 의족을 달기로 했다.
가족에게 차마 말하지 못했지만, 종열은 집보다 병원이 편했다. 아파트에서 엘리베이터를 탈 때면 종열은 왼쪽 다리 앞에 아들을 세웠다. 사람들이 자기 다리만 쳐다보는 것 같아 견디기 힘들었다. 집에서도 물 한 잔 마시려면 목발이 필요했고, 화장실은 기어서 들어갔다. 새 일을 구하는 것, 당구를 못 치는 것, 아이들과 캠핑을 못 가는 것…. 왼 다리가 없는 자기 모습을 받아들이기 힘든 종열에게는 나중에 해도 될 걱정이었다.
문득문득 화가 났다. 자신이 왜 다리를 잘라야 했는지 따져 묻고 싶다. 자신과 절단 부위가 같은 환자의 블로그를 찾아 그가 쓴 글을 읽었다. 서울에서 사고가 났는데 헬기를 타고 경기의 병원에 갔다고 했다. ‘나는 하루종일 병원 알아보다가 구급차 타고 갔는데. 내가 지방 사는 게 잘못인가. 아들이 다치면 그땐 어떡하지. 주말에 다치면 월요일이 돼야 의사를 만나는 건가….’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잠을 자지 못했다. 환상통에도 시달린다. 없는 왼쪽 다리가 저리고 아프다. 끊어진 혈관이 요동치는 것도 같다. 비 오는 날엔 실체 없는 통증이 더욱 심해졌다. 분명 긴 꿈을 꾸고 났는데 눈을 떠 보면 딱 1분이 지나 있었다. 꿈속에서 종열은 일을 하고 있었다. 거기서만큼은 다니던 공장의 풍경이 그대로였고 종열의 두 다리도 멀쩡했다.
●아물 수 없는 상처
이준규
지난달 10일 기자는 준규의 재활치료를 위해 아주대병원에 온 윤영과 인터뷰 했다.
“잘 지내셨어요? 준규는 지난주 목요일에 개학했어요. 학교를 보내도 되나 고민 많이 했거든요. 준규 또래 아이들이 워낙 과격하게 놀잖아요. 넘어지기라도 하면…. 근데 의사 선생님이 보내는 게 더 좋을 거라고 하셔서 용기를 냈어요. 대신 몸이 안 좋으면 바로 엄마한테 전화하라고 했어요.
개학 첫날부터 머리가 아프다고 했어요. 수업을 조금만 들어도 그렇대요. 대안학교에 보내야 하나 싶은데 준규를 멀리 보내는 게 망설여져요. 준규도 친구들이랑 떨어지기 싫다고 해요. 병원에 있을 때는 친구들 이름도 기억 못했는데 지금은 친구들 봐서 좋대요.
직장에요? 이제 준규 학교에 다니니까 일하는 데는 안 데리고 다녀요. 저 대신 막내가 준규를 봐줘요. 막내가 올해 중학생이 됐는데 준규랑 같은 학교거든요. 등하교를 같이 하죠. 형도 준규를 잘 챙겨줘요. 요리를 잘해서 저녁밥도 차려주곤 해요. 든든해요. 형도 있고 동생도 있으니까.
준규가 자꾸 수영가고 싶다고 조르는데 그건 못 보내겠어요. 넘어지기라도 할까 봐서요. 물론 마음이 안 좋죠.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체육시간에도 혼자 운동장에 앉아 있었대요. 운동하는 거 좋아하던 애가 친구들 축구하는 거 구경하면서…. 그래도 걱정이 될 수밖에 없어요. 전 겪었잖아요. 애가 쓰러져있는데 아무도 안 받아주는 걸. 절대로 아프면 안 되는 거잖아요. 아직도 그날만 생각하면….”
박종열
사고로부터 계절이 벌써 두 번 바뀐 지난달 17일, 기자는 창원병원에서 종열을 다시 만났다.
“의족은 나흘 전에 달았습니다. 아내도 의족한 거 오늘 처음 보네요. 며칠 전에 면회 왔는데 무리해서 움직이다 그날은 아예 의족을 못 했습니다. 잘 걷는 거 보여주려고 했는데 오늘 보여줘야지요.
긴 바지를 입으면 의족이 튀어나와요. 옥이는 티 안 나게 마네킹 다리를 덧대자고 하데요. 제가 사람들 시선을 신경 쓰는 걸 아는 게지요. 아직도 담배 사러 못 나갑니다. 환상통도 그대로예요. 시도 때도 없이 불안한 것도요.”
신기한 거 보여줄까요. 의족하고도 이렇게 다리도 꼽니다. 첫째 아이가 보면 엄청 좋아할 거예요. 로봇 다리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거든요. 애들 생각하면 얼른 일도 해야지요. 원래 회사요? 다리를 잃은 데서 도저히 일할 수가 없어요. 의족을 하고는 무거운 걸 들 수도 없고요. 아프거든요. 다리 잘린 곳에 굳은살이 붙으면 아픈 건 괜찮아진대요. 괜찮아지겠죠.
사고났을 때 단풍이 막 물들었는데 지금은 벚꽃이 피어있네요.”
228분의 표류를 무력하게 지켜본 그날을 떠올리며 윤영은 이날도 눈물을 흘렸다. 378분의 표류를 무력하게 겪은 그날의 기억으로 종열은 여전히 정신과 약을 먹는다. 우는 엄마를 위로하는 게 서툰 준규는 부러 씩씩하게 웃어보이며 말했다. “엄마, 나 살아 있잖아!” 미옥 역시 살아있다고, 그거면 됐다고 종열을 위로했다.
히어로콘텐츠팀이 37일 동안 만난 26명의 표류 환자 중 3명은 가족의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최명희(가명•59), 박선우(가명•66), 이나은(가명•3)은 돌아오지 못한 표류 환자다.
경기에 사는 명희는 월요일 밤 심한 두통을 느껴 119를 불렀다. 인근 병원에서 검사해 보니 뇌혈관이 막혀 있었다. 두개골을 가르는 개두술이 필요했지만 이 병원에는 개두술을 할 수 있는 의사가 없었다. 두 번째로 간 서울의 대학병원에는 중환자실 빈자리가 없었다. 세 번째로 간 경기의 대학병원에서 겨우 수술을 받았지만 뇌혈관이 막힌 걸 발견한 지 이미 6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그는 4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식물인간 상태다.
“할머니, 팔 줘.” 선우의 손자는 아침마다 세상에 없는 할머니를 찾는다. 손자는 선우의 팔을 베개 삼아 안기고서야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선우는 지난해 12월 자택에서 음식이 목에 걸린 탓에 숨을 제대로 못 쉬다가 심정지가 왔다. 작은 응급실에서 심폐소생을 받았지만, 혼수 상태에 빠져 큰 병원에 가야 했다. 4곳 병원에서 거절당한 끝에 3시간 후 경기의 한 대학병원에 도착했지만 끝내 숨을 거뒀다.
준규처럼 경련으로 구급차를 탔던 세 살 나은이도 1시간 동안 받아주는 병원을 찾다가 끝내 숨졌다. 인근 병원 11곳이 소아과 의사가 없다는 이유로 나은이를 받아주지 않았다.
표류를 겪은 환자가 전국에 몇 명이나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어떤 정부 통계에도 정확히 잡히지 않는다.
소방청이 내는 ‘재이송’ 통계는 구급차가 환자를 태우고 직접 응급실 앞까지 갔다 거절당한 사례만 보여준다. 2021년 전국에서 7634명이었다. 준규 이송 때처럼 전화 문의를 거절한 사례는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표류’의 극히 일부만이 집계된다. 구급대의 이송 문의 전화를 거절한 기록은 어디에도 남지 않는다.
다만 경기도소방재난본부가 2021년 5~12월 응급실 수용을 문의하는 119구급대의 첫 전화가 거절된 환자 수를 내부적으로 집계해 봤다. 6만9918명이었다. 소방청의 재이송 통계에 비해 기간이 더 짧은데도 그 수(7634명)의 9배가 넘었다.
종열 씨처럼 외상을 입고 수술받을 병원을 찾아 떠도는 건수 역시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다. 중앙응급의료센터가 내는 ‘4대 중증응급환자 전원율’ 통계는 중증응급환자가 처음 간 병원에서 치료받지 못하고 병원을 옮긴 사례를 보여준다. 2021년 1만7286명이었다. 하지만 응급실에서 병원 몇 곳에 전화를 돌렸는지, 전원 결정한 후 몇 분 만에 최종 치료 병원으로 옮겨졌는지는 집계하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응급환자가 골든타임을 흘려보내 생명이 위태로워지는지 알 길이 없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구급차를 탄 환자들이 제때 적절한 치료를 받아 목숨을 건졌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끝내 가족 곁으로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한 줄 기사조차 나오지 않는다. 준규 군과 종열 씨의 가족처럼 남겨진 가족이 겪는 고통에도 이름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지난달 19일 대구에서도 고등학생 A 양(17)이 2시간 12분의 표류 끝에 심정지 상태에 빠졌다. 끝내 숨을 거뒀단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역시 가려진 죽음이었다. 이런 죽음이 얼마나 더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가족, 친구, 이웃인 누군가가 겪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