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난달 24일 러시아 국경과 인접한 우크라이나 대도시 하르키우의 한 호텔. 워싱턴포스트(WP) 촬영기자 휘트니 리밍은 러시아군의 폭격과 함께 도심에 공습경보가 울려 퍼지자 현장 취재를 위해 막 객실을 나섰다.
그때 어디선가 침울하지만 절제된 피아노 선율이 들려왔다. 리밍은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찾으려 복도 끝으로 걸어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텅 빈 호텔 로비에 있는 흰색 피아노 앞에 한 소년이 앉아 있었다. 리밍은 곧바로 카메라를 꺼내 소년의 연주 모습을 담았다. 그가 연주한 곡은 ‘학교 가는 길(Walk to School)’. 2020년 아마존 프라임 공상과학 드라마 ‘루프이야기’에 삽입된 OST였다.
러시아군의 폭격으로 극도의 혼란이 벌어지던 상황에서 묵묵히 피아노를 연주하는 소년의 모습은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리밍이 WP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린 소년의 영상은 1일까지 조회 수 900만 회를 넘기며 널리 확산됐다. 많은 사람들이 홀로코스트 당시 유대인 피아니스트 이야기를 다룬 영화 ‘피아니스트’를 떠올렸다. 게시물에는 ‘침몰하는 배에서 악단이 연주를 계속하는 영화 타이타닉의 한 장면 같다’ ‘마음이 너무 아프다’ 등 2000개 넘는 댓글이 달렸다.
이 소식은 소년이 연주했던 ‘학교 가는 길’ 원곡 작곡자들에게도 전해졌다. 이 곡은 현대 미니멀리즘 음악의 대가인 작곡가 필립 글래스(85)와 폴 레너드모건(48)의 공동 작품이다. 글래스는 1일 성명을 통해 비통한 심정을 전했다. “이 음악이 정치적인 작품이 될 것이라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이미 그렇게 됐습니다. 무고한 사람들이 우리가 절대 마주하기 원치 않는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공동 작곡가인 레너드모건 역시 영상을 자신의 트위터에 공유하며 “누군가 삶의 가장 끔찍한 순간에 우리 음악으로 위안을 얻었다는 데에 말 못 할 감동을 받았다. 소년이 노래에서 위안과 희망을 찾았을지는 모르겠지만 음악은 모든 경계를 넘어서는 힘이 있는 듯하다”고 했다.
피아노를 연주한 소년이 누구인지 등에 대해선 알려지지 않았다. 리밍은 “취재 때문에 (촬영) 몇 분 뒤 호텔을 떠났는데 이후 소년과 그의 가족을 다시 보지 못했다”고 했다.
임보미 bom@donga.com